처절하게 비열해질 수밖에 없었던 밑바닥 인생들의 생존 싸움…날것이라 더 새롭다
대중에게 정우라는 배우를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못 해도 두 작품의 이름은 반드시 나올 것이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영화 '바람'(2009)으로 입소문을 탔고, '쓰레기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2013)를 통해 코믹 연기에 일가견이 있는 배우로 기억되던 그였다. 이후 차기작으로는 드라마적 측면이 강한 작품을 선택해 선보여 왔으나 코미디 장르만큼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해 아쉬움을 샀었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던 만큼 대중들에게 낯선 정우의 모습을 보인다는 건 배우 자신에게도, 제작진에게도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을 터다. 그럼에도 이 모험은 그만한 가치를 입증해 냈다. 정우에게 이런 '조선 누아르'는 마치 그를 위해 만들어진 장르처럼 보였다. 굳이 원류를 찾는다면 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장르적 한계도 정우를 비롯한 배우들의 묵직한 존재감과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제작진의 연출력으로 빈틈없이 막아낸다.
영화 '뜨거운 피'의 무대는 정우의 캐릭터가 가장 빛날 수 있는 1990년대와 부산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부산 변두리의 작은 포구 '구암'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손 영감'(김갑수 분)의 토착 세력과 영도파 건달들의 세력 다툼이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룬다.
극 중 정우가 맡은 희수는 구암의 절대적인 주인인 손 영감의 손발이 돼 수년 간 일해 온 토착 건달이다. 포구 사람들에게는 '삼촌'으로 불리며 해결사 역할을 도맡고 손 영감이 시키는 일이라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나서는, 조직의 오른팔 그 이상의 인물이기도 하다.
희수와 손 영감의 관계는 충성으로 묶을 수 있는 주종 관계로는 보기 어렵다. 희수에게 있어 손 영감은 자신의 가치를 보고 어느 정도 빛이 드는 양지로 꺼내 준 은인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다. 반대로 손 영감에게 희수는 친조카보다 더 믿음직한 아이로 사실상 양아들처럼 여기며 아끼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엔 결국 핏줄이 우선될 것이라 믿은 희수는 무엇 하나 이뤄낸 것 없이, 큰 돈 한 번 만져보지 못한 채 시다바리 건달로 삶을 마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마침 '범죄와의 전쟁' 이후 새로운 구역을 집어삼키기 위해 물색 중이던 영도파 건달들이 접근한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았던 구암에 눈독들인 이들은 구암의 절대적 지주인 손 영감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수족인 희수의 욕망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특히 함께 아동복지기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우정을 쌓았던 친구 철진(지승현 분)이 영도파의 에이스가 돼 자신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희수가 눌러뒀던 오랜 열등감을 불러내는 데 충분한 도화선이 됐다. 송 영감에 대한 철진의 이간질과 영도파의 실질적인 위협, 여기에 '제대로 된 인생을 살고 싶다'는 희수의 욕망까지 합쳐지면서 개인의 갈등은 조직의 전쟁으로 비화한다.
이후의 본격적인 스토리텔링은 희수 못지 않은 존재감을 자랑하는 또 다른 숨은 주역, 용강(최무성 분)으로도 이어진다. '응답하라 1988'의 택이 아부지로 말수가 적지만 다정한 홀아버지의 면모를 보여줬던 최무성은 이번 작품에서 '악마를 보았다' 속 태주를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이미지 변신에 나섰다. 속내야 어쨌든 겉으로는 점잔을 떨어대는 검은 양복의 건달들 안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버린 '또라이'로서 용강은 '뜨거운 피'가 낳은 캐릭터 가운데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을 캐릭터임은 확실해 보인다.
용강은 욕망에 과하게 솔직해진다면 결국 타락해 버릴 수밖에 없는 희수의 또 다른 미래를 예견하게 만든다. 영도파와 구암파, 각자 두 조직에서 사냥개처럼 쓰이며 발버둥치다 자멸할 수밖에 없는 장기말이라는 점에서도 두 캐릭터는 닮은 곳이 있다. 끝내 갈등하던 희수의 마지막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은인 손 영감이나 절친인 철진이 아닌 용강이라는 것도 이 작품을 오래도록 곱씹게 만드는 설정 중 하나다. 이런 생생한 캐릭터들이 '뜨거운 피'의 이야기에 끈질기게 이어지는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구암과 영도의 전쟁 속 진실에 다가가면서 더욱 고뇌할 수밖에 없는 희수의 요동치는 감정 연기는 정우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충혈된 눈과 불뚝 튀어나오는 볼 근육, 떨리는 아랫입술에 이르기까지 정우의 연기는 대사가 없어도 단 한순간도 놓치기 싫을 만큼 촘촘하게 감정을 엮어 나간다. 그를 코믹한 캐릭터로만 기억하고 있을 대중들에게 '뜨거운 피'는 장르의 특성과는 별개로 기분 좋은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정우라는 배우를 다시 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피'를 선택할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번외로, '뜨거운 피'는 정우와 지승현이 함께 출연한다는 점에서 영화 '바람'을 떠올리게 한다는 시사평을 받기도 했다. 1990년대 상고를 쥐락펴락하던 일진들에게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던 짱구(정우 분)와 그의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었던 3학년 일진 김정완(지승현 분)이 성인이 돼서 만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겠나 하는 우스갯소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바람'의 절망편이 '뜨거운 피'가 아니겠냐는 분석이 나올 정도니 '바람'을 떠올리며 '뜨거운 피'를 바라본다면 또 다른 재미있는 해석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향한 처절하고 치열한 생존 싸움을 그린 영화 '뜨거운 피'는 3월 23일 개봉한다. 개봉 첫주 주말인 3월 26~27일 양일간 정우, 김갑수, 최무성, 이홍내, 지승현, 천명관 감독의 무대인사도 예정돼 있다. 120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