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의 원천이었던 관계가 치욕이 되고,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안정적인 관계가 원수가 되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카프에 묻어온 한 올의 머리카락,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것이 의혹이 돼 파란을 만든다. 마치 손수건 한 장이 오셀로의 사랑을 지옥으로 만들어 데스데모나를 죽음으로 몰았던 것처럼. 질투 혹은 상처 입은 자존심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메데이아는 황금양털을 가진 콜키스의 공주다. 그녀는 마법사이기도 하다. 고대 사회에서 마법사란 술수를 부리는 자라기보다 약초를 다룰 줄 아는 의사다. 병을 알고 약을 아는 의사인 것이다.
그녀의 남자 이아손은 왕이 되기 위해 황금양털이 필요했다. 신성한 아레스 숲속의 떡갈나무에 걸려있는 황금양털은 결코 잠드는 법이 없는 용이 지키고 있다. 어찌할 것인가. 그때 이아손을 도운 존재가 바로 콜키스의 공주이자 마법사인 메데이아였다. 아버지의 황금양털을 훔쳐 사랑하는 이아손에게 건네고 그와 도망친 것이다. 추격하며 따라오는 동생까지 죽였으니 사랑할 때도 그녀는 잔인하고 억척스러웠다. 아무튼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영웅의 임무는 완성된다.
황금양털을 가지고 귀환한 영웅은 메데이아와 결혼해서 아이를 둘을 얻고 평화로운 10년을 보냈는데도 아직 왕이 되지 못하고 있다. 왕이 되고자 하는 영웅에게 왕좌는 언제나 유혹적인가.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코린토스의 공주와 정혼하고 메데이아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이런 남자, 어떤가.
아버지를 배반하고 얻는 남자가 다른 사람과 살아야겠다며 ‘나’를 배반하려 할 때 지금의 나라면 믿을 수 없는 남자와 미래를 함께하는 것이 아까워 잘 가라고 보내줄 것 같다. 그런데 한참 커가는 아이가 둘이나 있는 20~30대에도 그럴 수 있었을까? 더구나 메데이아는 “나의 감정은 나의 이성보다 강하다”고 선언하는 여자이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아버지를 배반하고 형제를 죽일 수도 있는 여자인데. 그녀의 복수극은 잔인하고도 처절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비겁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직접 이아손을 건드리지 않고, 이아손의 여자를 죽이고, 이아손이 가장 아끼는 자기 아이 둘을 죽인다. 처절하지만 비겁한 비극이다.
그 버려짐의 상황에서 메데이아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는 여인이 있다. 바로 테세우스를 사랑했던 아리아드네다. 영웅 테세우스는 미궁에 들어가 괴물을 쳐부수었다. 그런데 난제가 남았다. 미궁은 미로이기 때문에 살아 돌아온 이가 없었다는 것.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살아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리아드네의 도움 때문이었다. 아리아드네의 실로 알려진 그녀의 지혜 덕택에.
그런데 그녀 덕택에 목숨도 구하고 영웅도 된 테세우스는 낙소스 섬에 그녀를 버려두고 홀로 몰래 떠나버린다. 그녀는 메데이아처럼 복수하지 않고 스스로 상실의 상처를 감내한다. 메데이아처럼 버려졌지만 그녀가 상대에게 증오를 투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으로도 빼앗아갈 수 없고 그 어떤 고통 속에서 포기할 수 없는 자기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상실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있는 원형적인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상대를 지옥 불에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지옥도 감수하겠다는 메데이아, 슬픔과 우울 속에서 상실을 애도하다가 슬픔을 떠나보내고 다시 시작하는 아리아드네, 당신은 어느 쪽인지.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