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 ‘유부남=가해자’ 공식 깨져…현실과 달리 드라마선 복수·응징 ‘카타르시스’
#불륜 드라마, 언제 시작했나
불륜극의 시초는 드라마보다 영화가 먼저였다. 물론 고전 속에도 불륜은 등장하지만,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자유부인’(1956)과 ‘하녀’(1960)가 원조 격이다. 인간사 속에 불륜을 저지르고 간통죄로 처벌받아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를 콘텐츠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그래서 관람 등급에 따라 관객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영화에서 먼저 시도할 수 있었다.
불륜을 다룬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의 거목인 김수현 작가의 등장과 같은 궤를 그린다. “당신, 부숴버릴거야”라는 대사로 유명한 ‘청춘의 덫’(1979)이 출발선이라 볼 수 있고, 이 드라마는 추후 배우 심은하가 출연하는 작품으로 리메이크됐다. 사진=SBS 드라마 ‘청춘의 덫’ 홍보 스틸 컷
불륜을 다룬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의 거목인 김수현 작가의 등장과 같은 궤를 그린다. “당신, 부숴버릴거야”라는 대사로 유명한 ‘청춘의 덫’(1979)이 출발선이라 볼 수 있고, 이 드라마는 추후 배우 심은하가 출연하는 작품으로 리메이크됐다. 그 사이 ‘모래성’(1988) 역시 대중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된 불륜 드라마로 꼽힌다.
무조건 ‘욕먹는’ 콘텐츠였던 불륜 드라마는 가벼운 터치로 접근하는 트렌디 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1990년대 들어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배우 유동근과 황신혜가 출연했던 ‘애인’(1996)은 불륜의 음지보다는 양지에 방점을 찍었다. 당시 이 드라마의 OST뿐만 아니라 유동근이 입고 나온 파란색 셔츠와 멜빵이 유행될 정도였다. 비교적 최근작인 ‘애인 있어요’(2015)와 ‘공항 가는 길’(2016) 역시 불륜 커플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흐름으로 “불륜을 미화한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으나, 불륜 커플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소 바꿔놓은 작품으로 꼽힌다.
이는 사회적 변화와 맞물린다. 남성은 성공한 사업가, 여성은 전업주부라는 이분법적인 분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며 무의미해졌다. 남성이 적극적으로 불륜을 이끌어가는 주체이고 여성은 피해자라는 구도가 깨진 셈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 불륜의 주체로 나서고 남성이 무조건 가해자라는 시선 역시 줄어들며 불륜극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무조건 ‘욕먹는’ 콘텐츠였던 불륜 드라마는 가벼운 터치로 접근하는 트렌디 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1990년대 들어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유동근과 황신혜가 출연했던 ‘애인’(1996)은 불륜의 음지보다는 양지에 방점을 찍었다. 사진=MBC 드라마 ‘애인’ 홍보 스틸 컷
#왜, 불륜에 끌리나
불륜 드라마에 끌리는 가장 큰 이유는 ‘자극’이다. 불륜 드라마는 단순히 ‘남편(아내)이 다른 여성(남성)을 만난다’는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불륜은 항상 섹스, 배신, 다툼, 이혼이라는 숱한 행위들과 함께 움직인다. 불륜을 저지르고, 이를 파헤치고 응징하는 과정에서 이 모든 키워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이런 자극적인 상황을 드라마 연출을 통해 낱낱이 대중 앞에 까발리니 어찌 눈이 가지 않을 수 있으랴.
불륜 드라마가 대중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이유는 ‘현실성’이다. 살인 등 강력사건을 다룬 작품이나 판타지 드라마는 ‘가상’이 전제다. 내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 하지만 불륜 드라마는 다르다. 드라마 속 상황이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특히 TV 드라마 시청률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은 중장년 여성들이다. 이미 불붙는 사랑을 나누던 시기를 지나 ‘가족’의 범주로 들어온 남편에 대한 불안감과 의심은 작은 일에도 발동할 수 있다. 주변에서 실제로 불륜으로 인해 고통 받는 지인이라도 있다면, 이런 드라마 속 전개가 도무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을 법하다.
마지막 이유는 ‘대리만족’이다. 대다수 불륜 드라마는 권선징악으로 끝난다. 한번 균열이 간 가족이 온전한 형태로 되돌아가기는 어렵지만, 불륜으로 한 가정을 파탄 낸 이들에게는 확실한 응징을 가한다. 2015년 이후 간통죄가 폐지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접하기 힘든 결론이다. 드라마는 그것을 해내며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또 불륜극?’이라지만 김희애의 연기와 그가 펼치는 이야기에 시청자들은 또 설득 당한다. ‘부부의 세계’에서 명장면 가운데 하나로 불리는 두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 지선우가 우아한 한 방을 날리는 장면. 사진=JTBC ‘부부의 세계’ 홈페이지
#김희애의 불륜 드라마는 왜 다른가?
한국의 불륜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 배우 김희애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부부의 세계’ 이전에도 ‘내 남자의 여자’(2007), ‘아내의 자격’(2012), ‘밀회’(2014) 등 다수의 불륜 드라마를 성공시켰다.
하지만 그는 매번 달랐다. ‘내 남자의 여자’와 ‘밀회’ 속 김희애는 불륜의 주체였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는 고교 동창의 남편과 바람이 났다. ‘밀회’에서는 아들뻘 되는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그는 사랑 앞에 당당했다. 사회적으로 이미 성공한 그가 능동적으로 사랑을 쟁취해가는 모습은 손가락질과 부러움을 동시에 받았다. ‘아내의 자격’에서도 그는 불륜의 당사자였지만 앞선 두 작품에서와는 태도가 달랐다. 아내이자 엄마로서 번민하는 모습이 강조되며 동정 여론이 일기도 했다.
그런 김희애가 ‘부부의 세계’에서는 불륜의 피해자가 됐다. 그가 맡은 지선우는 능력 있고 명망 높은 의사인 데다, 뒤처져 있는 남편을 위해 영화 제작사를 차려줄 부(富)까지 지녔다. 게다가 엄마로서도 완벽한 삶을 일궈왔다. 그런데 이토록 헌신한 자신을 뒤로하고 남편이 새파랗게 어린 여성과 불륜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됐고, 주변 이들도 이 불륜에 동조했다. 청천벽력 같은 상황 속에서도 지선우는 자신이 무너지는 대신 남편을 파멸시키는 것을 택했다. 그의 수위 높은 복수에 시청자들은 열광했고, 이는 시청률로 증명됐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결국 김희애의 연기력이 빚은 결과”라며 “‘또 불륜극이냐’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김희애의 연기와 그가 펼치는 이야기에 설득당했다는 의미다. 김희애가 출연하는 불륜 드라마가 ‘막장’이라 불리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