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조달 확대에 연체율 등 잠재 리스크 ‘꿈틀’…채용 일정 연기, 미래전략도 ‘올스톱’ 상태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정부의 금융지원 정책에 보조를 맞추고 있는 시중은행들이 딜레마에 빠졌다. 사진=연합뉴스
정부가 코로나19 확산 이후 개최한 비상경제회의는 지금까지 총 5차례다. 245조 원 규모의 재정, 금융지원이 이 회의에서 결정됐다.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등 각종 정책금융기관들이 자금조달 대부분을 부담하면서 금융 지원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동시에 정부는 시중은행에도 자금 지원 역할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대기업까지 지원 대상으로 포함돼 규모가 커진 만큼 국책은행과 정부 재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다.
대신 시중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전반에 대한 규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해주기로 했다. 유동성과 자산건전성, 영업 등 부문에서 제재 수준을 낮췄다. 금융사가 규제 빗장에 막혀 자금 공급을 주저하는 상황을 사전에 막고 금융지원 대책이 제때 실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복안이다. 정부는 규제완화로 금융권의 자금 공급 여력이 최대 394조 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 금융 지원 대책을 두고 한 시중은행 임원 A 씨는 “경제 위기 속에서 공적 역할을 담당하는 건 은행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앞서의 국책은행뿐만 아니라 사기업으로 볼 수 있는 시중은행도 정부의 인허가를 받아야만 사업을 할 수 있고, 공공재를 통해 수익을 내는 만큼 금융시장 안정과 위기 극복에 기여해야 하는 선관주의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정부 정책에 보조를 맞춰 시장에 자금을 공급하는 일에 대해서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다만 경영을 고려해야 하는 ‘민간회사 임원’으로서의 입장은 다소 다르다고 했다. 금융 지원과 코로나19 사태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A 임원은 “향후 수익성과 건전성이 동시에 악화될 것이 불 보듯 뻔해 고민이 깊다”며 “올해 초 구상한 수익과 재무 계획 등을 대부분 뒤집었다. 현재로선 리스크 관리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꿈틀대는 ‘잠재 리스크’
최근 시중은행 기업 대출 창구에는 자금조달이 막힌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은 물론 대기업까지 밀려들고 있다. 4월 정부의 금융규제 완화 정책 이후 은행들이 대출금리를 내리고 조건을 완화한 직후부터다. 특히 규모가 큰 대기업 대출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NH농협·신한·KB국민·우리·하나, 국내 5대 시중은행의 집계를 보면 지난 4월 대기업 대출 잔액은 88조 5074억 원으로 지난 2월 이후 두 달 사이 13조 6464억 원 늘었다. 2016년 조선·해운업 위기로 90조 원을 돌파한 이후 4년 만의 최고치다.
그동안 대기업 대출 잔액 증감폭은 2조 원 안팎이었다. 지난해에는 월평균 70조 원대를 유지하면서 수천억 원가량이 줄거나 늘어나는 수준이었다. 대기업들은 회사채 등을 통해 더 나은 금리 조건으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직접 조달해왔는데, 최근 들어 은행 대출을 크게 늘리고 있다는 것이 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통상 3월엔 기업들이 대출을 늘리는 시점이긴 하지만 최근 증가세는 이례적”이라며 “기업들이 보통 개설하지 않는 마이너스 통장을 대규모로 열었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자영업자를 포함한 중소기업 대출 잔액도 늘었다. 지난 4월 기준 463조 9291억 원으로, 전월보다 8조 4374억 원 증가했다.
은행 내부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규모 대출이 짧은 시간에 가파르게 늘면 잠재 리스크가 커진다. 대표적으로 은행 건전성 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연체율이 오르고 있다. 금감원이 발표한 2월 말 은행의 원화 대출 연체율은 0.43%로 1월 말과 비교해 0.02%포인트(p) 상승했다. 5대 시중은행의 별도 집계를 종합하면, 3월 연체율도 전달과 비교해 소폭 늘었다.
숫자만 보면 걱정할 만한 수준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통상 은행들이 분기 말에 부실 채권을 상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 집계된 연체율은 크게 내렸어야 했다. B 은행 관계자는 “1개월 이상 연체를 한 채권이 연체율의 기준이라 5월부터 코로나19에 따른 연체가 본격적으로 잡힐 것”이라며 “감염병 위기가 끝난다 하더라도 기업과 개인의 자금 여력이 곧바로 회복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추세라면 당분간 연체율이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밖에 대출 확대에 따른 충당금 설정에도 고민이 깊다. 충당금을 많이 쌓을수록 수익성과 건전성이 악화된다. C 은행 관계자는 “보수적으로 충당금을 분석하고 있는데, 추가로 더 설정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국책은행은 건전성에 심각한 위기가 생기면 정부가 보전해줄 수 있지만 시중은행은 그렇지 않아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채용, 미래 전략도 올스톱
시중은행들은 최근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두산중공업과 아시아나항공 등의 채권을 가지고 있다. 국책은행들과 금융당국이 시중은행들이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은행 수익성과 건전성을 가르는 위험노출액을 고려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특히 2016년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당시 은행들은 대우조선해양과 STX 대출채권에서 부실이 발생하자 이를 한 번에 손실로 처리하면서 수천억 원의 손실을 떠안기도 했다.
2019년 말 기준 5대 시중은행의 기업 여신 위험노출액은 전년과 비교해 이미 10%가량 늘어나 있었다. 기업의 신용등급 등에 따라 위험노출액이 달라진다.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치면서 현재 국내 주요 기간산업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신용등급이 내려가거나 예고돼 있다. 최근 제주항공의 이스타항공 인수자금 지원에도 소극적인 것도 같은 이유다. 국책은행들은 지난 3월부터 신디케이트론(다수의 금융기관이 공동 참여하는 대출 등) 방식으로 5대 시중은행에 참여를 요청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곳은 없다.
고민은 채용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시중은행들은 최근 수년 사이 디지털 전환 작업에 방점을 찍고 점포와 인력을 줄여왔는데, 정부가 이번 코로나19 위기 극복 과정에서 ‘고용 유지’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고 있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공적 역할이 강조되는 은행 입장에선 채용규모를 늘리기도, 줄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과 IBK기업은행 등은 최근 채용절차를 시작했다. 지난 2월 필기시험을 치른 NH농협은행은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오는 5월 중순 면접을 실시한다. 상반기 채용 시점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은행과 신한은행은 공채를 하반기로 미루는 대신 디지털, 정보통신 분야를 수시 채용으로 전환했다. 하나은행과 KB국민은행은 일찌감치 하반기로 채용을 미뤘다.
‘이자 장사’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운 해외 영업과 IB(투자은행) 부문 확대 전략은 뒷전으로 밀렸다. 앞서 기업들이 해외 투자를 확대하면서 은행들도 해외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코로나19 이후 ‘올스톱’됐다. 환율 흐름도 불투명하고 기업들도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어 올해 초 세운 계획을 추진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올해 1분기 시중은행들은 기대 이상의 실적을 기록했다. 당초 은행들의 당기순이익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약 1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1.4% 줄어드는 데 그쳤다. 개별 은행별로는 오히려 더 늘어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와 금융지원 정책 여파는 2분기 이후부터 실적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점쳐진다.
특히 잇따른 기준금리 인하로 핵심 수익원인 이자이익이 지난 1분기 하락하기 시작했던 것을 감안하면 2분기에 늘어난 대출 실적이 잡히더라도 이자이익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소폭 늘어나는 수준에 그칠 것으로 관측된다. 한 대형 증권사 연구원은 “정부가 규제를 완화해주면서 지원을 독려하고 있는 만큼 시중은행들의 실적 하락은 급격하진 않겠지만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