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19일 현대그룹 경영권분쟁에 관한 첫 기자회견장을 나서는 현정은 회장. 맨 왼쪽이 김재수 그룹경영전략본부장, 맨 오른쪽 뒤가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이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벼랑 끝으로 향하고 있는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간의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항간에는 “정상영 명예회장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정몽헌 전 회장 시절부터 핵심 가신으로 일해온 인사들의 작품이라는 관측이 많다.
현재 가신그룹으로 지목되는 인물은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과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그리고 김재수 현대그룹 경영전략본부장 등 세 사람. 이들 중 김윤규 사장과 김재수 본부장은 지난 2000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 시절에도 핵심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들 세 사람이 이번 사태의 주역으로 지목되는 것은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 등 현대그룹 계열사의 지분매입에 나서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가신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
실제로 정 명예회장은 KCC 명의로 지난 2일 언론사에 보낸 ‘진실을 밝힌다’는 제목의 석명서에서 “조카(고 정몽헌 회장)가 믿었던 최측근마저 배신을 하고, 다른 부하들도 검찰조사에서 고 정 회장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며 가신들을 비난했다.
정 명예회장은 또 현대엘리베이터 등 현대그룹 계열사의 지분매입 배경과 관련해 “장형(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업은 현대가의 것이다. ‘정’씨가 아닌 성을 가진 사람은 자격이 없다”는 ‘정가소유’의 명분론을 내세웠다.
그러면 왜 정 명예회장과 현대그룹 가신들은 반목의 관계에 선 것일까.
현대그룹 고위 관계자가 전하는 얘기를 종합해보면 정 명예회장은 지금까지 현대그룹과는 별개로 자신의 사업을 해왔지만, 평소에도 가신들의 득세에 대해 불평을 많이 해왔다고 한다.
특히 KCC그룹의 사업특성상 현대그룹 계열사(예를 들면 현대건설, 현대상선 등)와 거래를 많이 해온 정 명예회장은, 그동안 가신들의 방해로 개인적인 수모를 받은 적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정 명예회장이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에 대해서는 줄곧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거나 두둔하고 있는 것도 이를 말해주는 부분이다.
▲ 정상영 KCC 명예회장 | ||
이 같은 얘기가 돌고 있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김문희씨 역시 현 회장과 마찬가지로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 등 현대그룹의 경영에 참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김문희씨는 올 들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대거 매집하며 1대 주주가 됐지만, 사실 이 회사의 경영과 관련해 자질구레한 일들을 알기는 힘든 상황이다.
이렇다보니 김문희씨가 딸인 현정은 회장을 그룹 회장으로 앉히기까지 가신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정 명예회장의 주식매집만 해도 그렇다. 정 명예회장은 현재 ‘당초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우호세력인 것처럼 위장해 주식을 사들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현재로서는 과연 정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뺏을 명목으로 주식을 매입한 것인지, 아니면 외국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식을 사들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나는 현정은 회장이 취임한 직후 가신들의 움직임이다. 현 회장이 지난 10월 말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으로 취임한 직후,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 김재수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장 등은 한시도 그의 곁은 떠나지 않고 있다.
이런 모습은 지난 11월에 있었던 현 회장의 기자회견장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당시 현 회장은 ‘현대그룹의 국민기업화’를 선언하며 언론의 질문세례를 받았으나 정작 그가 대답한 것은 거의 없었다.
엄밀히 말해 그가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대답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해석이다.
현 회장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옆에 앉은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 등이 귓속말로 ‘무언가’를 얘기했다.
특히 현 회장은 “전문경영인들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겠다”고 못박아, 이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정 명예회장의 심기가 더 불편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정상영 명예회장이 노골적으로 현대가 가신들을 향해 불만을 터트리자 정몽헌 회장 사후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보이던 가신들이 최근 생존을 위해 단결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실제로 정몽헌 회장이 작고한 뒤 그룹 경영문제를 두고 가신들 사이에서는 오너십 문제로 티격태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공동운명체에 처한 이들은 단합해 정상영 명예회장측의 공세에 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현정은 회장측이 밝힌 국민주 모집문제도 가신들의 작품이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이처럼 가신들의 공세가 거세지자 정상영 명예회장은 문화일보 부사장을 지낸 이영일 전 현대그룹 문화실장을 전격 영입해 여론몰이에 나섰다.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은 현대가 가신들과 정상영 명예회장간 한판승부로 요약되면서 점차 달아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