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앞두고 부친 조양래 회장 지분 급하게 승계…2남2녀 중 차남에 몰아줘 ‘형제의 난’ 불씨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이 자신의 지주사 지분 전량을 차남이자 이명박 전 대통령 사위인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한국타이어) 사장에게 넘겼다. 조현범 사장이 하청업체로부터 돈을 챙기고 계열사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2019년 1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한 모습. 사진=연합뉴스
조현범 사장은 지난 6월 26일 블록딜(시간외 대량매매) 형태로 아버지 조양래 회장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지분 23.59% 전량을 매입, 지분을 19.31%에서 42.9%로 늘리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자금은 한국테크놀로지그룹과 한국타이어 보유 지분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받아 마련했다. 장남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은 19.32%, 장녀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은 0.83%, 차녀 조희원 씨는 10.82%로 지분율이 그대로다.
이번 지분 변동으로 그룹 후계자는 차남이 낙점됐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한국타이어·한국아트라스비엑스·한국네트웍스·한국카앤라이프를 지배하는 지주사다. 당초 조현식 부회장과 조현범 사장의 지분 차이는 0.01%에 불과했다. 조 부회장은 지주사 대표이사·부회장으로서 그룹 신사업을, 조 사장은 지주사 최고운영책임자(COO)이자 한국타이어 대표이사·사장을 맡아 타이어에 집중하는 형제경영 체제로 이어왔다. 조양래 회장이 누구를 택하느냐에 따라 승계구도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차남의 경영능력 인정?
업계에서는 조현범 사장이 지분을 넘겨받은 이유로 경영능력을 꼽는다. 조 사장이 한국타이어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IT사 모델솔루션과 독일 타이어 유통사 라이펜-뮬러, 자동차판매 온라인플랫폼 웨이버스를 인수하는 등 활발한 인수·합병(M&A)에 나섰다. 조 사장이 M&A와 신사업을 적극 추진하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타이어업계 관계자는 “형과 동생이 역할을 나눴지만, 그룹 주력사는 동생이 맡은 한국타이어다. 신사업 투자비용이 이쪽에서 많이 나와야 하고 타이어사업과도 연관돼야 하기에 형제 모두 신사업에 깊이 관여했을 것”이라면서 “다만 조 부회장은 차분한 반면 조 사장은 적극적인 마케팅과 행보로 눈에 띄었다. 아버지가 활발하게 활동한 차남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조현범 사장이 그룹 핵심 한국타이어를 맡았고 한국타이어 보유 지분도 2.07%로 조현식 부회장(0.65%)보다 많다는 점에서 이전부터 승계구도는 기울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며 “지금 지분을 넘긴 이유는 주가를 최저 수준으로 판단해 자금 부담을 덜려는 차원”이라고 해석했다.
조양래 한국테크놀로지그룹 회장이 자신의 지주사 지분을 차남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에게 전량 매각하면서 그룹 후계구도가 확실해졌다. 다만 조 사장이 재판을 앞둔 상황에서 급하게 승계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경영권 분쟁 가능성까지 나오는 등 뒷말이 무성하다. 조 사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오른쪽)이 2016년 대전 한국타이어 테크노돔 준공식에 참여한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번 지분 매입에는 조양래 회장보다 조현범 사장의 의지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란 의견도 적지 않다. 조 사장은 납품업체로부터 6억 1500만 원을 챙기고, 계열사 자금 2억 6000만 원을 빼돌린, 배임 횡령·혐의로 지난해 말 기소됐다. 지난 4월 1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6월 대표이사직을 사임해 현재 2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조현범 사장의 무리수?
조현범 사장 기소 이후 그룹 내 신사업은 동력을 잃었다. 대신 올 초 그룹 조직개편·인사나 외부 활동에서 조현식 부회장이 두각을 드러냈고, 서먹했던 현대자동차와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현대차는 2014년 신형 제네시스에 장착한 한국타이어 제품 결함으로 대규모 리콜을 실시했고, 이후 현대차 신차에서 한국타이어를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조 부회장이 최근 한국타이어 태안 주행시험장 내 현대차 드라이빙센터를 조성하기로 협약을 맺자 시장에서는 관계 회복 신호로 받아들였다.
조현범 사장 입장에선 그룹 내 입지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 당분간 회사 복귀도 어렵게 되자 위기감을 느끼면서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시행령 개정에 따라 5억 원 이상 횡령·배임 등을 저지른 경영진은 특정기간 취업이 제한된다. 조현식 부회장도 친누나가 미국법인에 근무하는 것처럼 꾸며 1억여 원을 지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사건 규모 면에선 조 사장보다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차남이 기소되고 장남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지분을 승계했다. 더욱이 2심 재판을 앞둔 와중에 이뤄졌다는 건 많이 급했다는 뜻”이라고 평가했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고 조홍제 전 효성그룹 회장도 장·차남에게 효성과 한국타이어를 나눠줬고, 조양래 회장도 이전까지 장·차남에게 동등한 지주사 지분을 주고 조희원 씨에게 캐스팅보트 10%를 줬다”며 “승계 의지가 있었다면 계열사 분리 등 정리했을 텐데 차남이 장외 매수로 지분 균형을 깬 모습은 가족 간 합의 없이 조 사장 의지로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라고 추측했다.
#잠재적 리스크 보이는 까닭
다만 재계 일부에서는 조양래 회장이 갑작스레 지분 전량을 장남이 아닌 차남에게 넘겨줬다는 점이 의아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재계에서는 범효성가가 표면적으로는 ‘형제경영’을 추구하지만 그룹의 핵심 계열사나 이름은 장자에게 넘겨주는 장자승계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효성그룹을 창업한 고 조홍제 회장 역시 효성은 장남 조석래 회장에게 넘겨줬다.
이런 이유로 차남이 지분을 독식했다는 점은 향후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남긴다는 관측도 있다. 재계 한 고위 인사는 “아무리 조현범 사장이 강하게 어필했다 해도 조양래 회장이 지분을 한꺼번에 모두 넘겼다는 것은 조 회장의 의중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며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간 합의가 되지 않았다면 향후 더 큰 일이 휘몰아칠 수 있다”고 조심스레 내다봤다.
이번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 조현식 부회장이 향후 다른 가족을 포섭하고, 국민연금(6.24%) 등 제3자의 지지를 끌어내려 할 수 있다는 것. 조현식 부회장과 두 누나의 지주사 지분을 합하면 30.97%다. 한국테크놀로지그룹 측이 “최대주주는 변경됐으나 형제경영 체제는 변함없다”고 했고, 조 부회장을 지지한다고 알려진 조희원 씨도 중립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갈등 예견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박주근 대표는 “장·차남 지분 차이가 너무 커 분쟁 가능성이 많진 않지만 잠재적 리스크를 안고 갈 것으로 보인다. 중립을 선언한 조희원 씨는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측에 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만약 분쟁시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쥘 것”이라며 “조현식 부회장 우호지분이 33%를 넘으면 조 사장 혼자 주주총회에서 합병·분할 등 특별결의 안건을 결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장남 측이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룹 개편 가능성도 언급된다. 배임·횡령 이슈로 글로벌 이미지가 실추된 지금 ‘형제의 난’까지 벌어지면 타격은 더 커진다. 앞의 재계 관계자는 “장·차남 지분율이 엇비슷하면 모르겠지만 현재는 장남이 누나들 지분을 다 합쳐도 이기기 어렵다”며 “계열사나 권한을 나누며 타협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