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땐 ‘용감무쌍’ 5·16 땐 ‘중립’
▲ 1952년 동부전선 고지(맨 왼쪽이 필자). |
임부택 소장은 대한민국 사병 군번 1번 즉, 110001번으로 유명하다. 1946년 6월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1기 출신으로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1948년 8월 육군본부작전국 작전과장이 됐고, 한국전쟁 발발 시에는 춘천에 있는 6사단 7연대장으로 서울이 2일 만에 함락하는 등 모든 전선이 무너질 때 인민군 침공을 6일간이나 막아냈다. 임진왜란에 대비한 이순신 장군처럼 임부택도 한국전쟁이 나기 전 미리 참호를 파고 각종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일부에서 한국전쟁 전 임부택이 장성이었다면 전쟁의 양상이 달랐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춘천 상황을 자세히 보면 모든 사단장들이 6·25 당일 전선을 비우거나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할 때 임부택은 적 2개 사단을 상대로 춘천을 지켜냈다. 이 때문에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고도 한강 이남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원래 춘천으로 내려온 인민군 사단이 수원까지 돌아내려와 국군후방을 치기로 작전을 짜 놓았는데 이게 틀어진 것이다. 서울의 인민군은 무려 3일간 춘천 전투를 지켜보며 대기했다. 이 사흘 사이 유엔군 파병이 결정나고, 미군이 부산항에 들어올 수 있었다. 춘천의 임부택이 아니었다면 맥아더 장군이 노량진 진지를 순찰하며 한강 너머 용산을 바라다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 임부택 7연대장은 명령에 의해 후퇴하면서도 충북 음성 무극에서 인민군을 섬멸하여 개전 이래 유일한 대승을 기록했다. 얼마나 큰 승리였던지 7연대는 전원 1계급씩 특진했고, 임부택 연대장도 대령으로 진급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을 할 때는 문경 충주 원주 춘천 화천 평강을 거쳐 순천 개천을 지나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합창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압록강물을 떠서 보낸 것도 임부택 대령이었다. 즉 그는 통일 염원의 상징이었던 압록강에 제일 먼저 도달한 부대장으로서 용맹을 떨쳤다. 미군이 도달한 혜산진보다 국군이 앞선 것이다.
이후 임 대령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사단의 철수 명령을 받고 10월 30일 압록강을 뒤로하고 용인 이천 여주 원주를 잇는 유엔군 방어선까지 후퇴했다.
그는 한국전쟁 내내 최전방에서 연대장, 부사단장, 사단장으로 싸웠다. 그러다 휴전을 맞이했고 5·16 군사혁명 직후 제1군단장을 끝으로 예편됐다.
군인으로 최고의 전투력을 보여준 임부택 장군은 자기 과시를 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특히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도 그래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참군인으로 덕장이고 지장이고 용장인 것은 분명했다. 옆에서 작전계획을 세우고 지휘하는 것을 보면 어디서 그런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가 나오는지 놀랍기만 했다.
필자가 임부택 대령을 만난 것은 처음 전방 배치 발령을 받고 부임한 보병 6사단 7연대였다. 장소는 연대본부가 위치한 충북 광혜원리의 광혜의원이었고, 임 연대장은 코밑에 이른바 카이저(Kaiser) 수염을 하고 방한모와 방한복을 입는 독특한 모습이었다.
1951년 1월 7일이었다. 이때 7연대는 압록강 초산에서 밀려 내려와 동두천을 거쳐 광혜원리까지 남하해 있었다. 상급부대인 6사단 사령부(장도영 사단장)는 충북 진천에 위치했다. 진천서 광혜원리는 40리인데 중간에 하천이 있었고, 당시는 다리도 없어 오갈 때는 물속을 건너서 가야 했다.
필자는 1950년 12월 23일 밤 10시 청량리 역에서 육군본부 보급품과 쌀가마를 잔뜩 실은 화물열차를 탔다. 쌀가마를 천장 바로 밑까지 가득 실은 까닭에 그 위에 앉은 필자는 머리를 숙여도 자꾸 천장에 방아를 찧었다. 그렇게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자세로 기차를 탄 채 중앙선, 즉 양평-문경-안동-영천을 거쳐 다음날인 12월 24일 오후 4시 대구역에 도착했다.
앞서 UN연락장교단은 서울의 명동 천주교회 내의 소학교에 있었는데 갑자기 비상소집령이 내려지고 모두 청량리역에 집결하게 된 것이다. 주번사관이 현 중위(가수 현인의 동생)였는데 자기는 외출이 안 되니 청진동에 있는 형 현인에게 가서 청량리로 나오라고 이야기 좀 해달라고 사정했다. 갔더니 어떤 여자가 있었고, 얘기를 전달했다. 우리 초급장교들은 쌀가마 위에서 벌벌 떨고 있었고, 현인은 서국신 중령과 스토브 옆에 있었다. UN연락장교단의 초임장교들은 대개 서울대, 연희대, 고려대 학생들이었다. 현인에게 ‘신라의 달밤’을 불러달라고 주문했는데 나라가 이런 상태인데 좀 그렇다며 이 다음에 회복이 되면 부르겠다하고 사양하는 것을 지켜봤다.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쳐 대구에 왔고, 대구향교에 주둔했다. 곧 1월 3일 서울이 중공군에 의해 함락되고 필자는 1월 4일 대구를 출발하여 남하하는 수많은 피난민과는 반대 방향으로 대전과 천안에서 각각 1박을 하고 진천에 있는 6사단 사령부를 찾아간 것이다.
▲ 1952년 11사단 사령부(가죽 점퍼를 입은 사람이 임부택 장군). 아래는 1952년 봄 간성 5사단 사령부에서(왼쪽부터 임부택 사단장과 필자). |
한미 연합작전이 절대적이고 미8군이 작전권을 갖고 있어 대대까지 미국 군사고문이 나와 있을 때였다.
1951년 1월 25일 UN군은 일제히 용인, 이천, 여주, 원주선을 공략해서 북진을 다시 시도했다. 이대 6사단 7연대는 용인(그 당시 금낭장)의 네거리 서북쪽편의 151고지를 점령했다.
필자도 임부택 연대장을 따라 경기도 백암의 전방지휘소까지 갔다. 용인 전투가 끝나자 7연대는 사단 예비연대가 돼 장호원리까지 이동해 2주일쯤 있었다.
그런 차에 장호원리에 갑자기 미군사고문단장(준장)이 찾아왔다. 목적은 압록강 초산에 제일 먼저 진격한 임부택 연대장이 보고 싶어 일부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 미군 장성은 민가의 방 하나를 쓰고 있는 연대장실에서 임 연대장과 잠깐 환담을 하고 돌아갔다.
7연대는 그 후 광탄에서 고립된 적이 있었는데 탄약 등 보급품은 낙하산으로 공수를 받았고 음식은 쌀과 파와 소금밖에 없어 소를 잡아먹기도 했다. 이후 다시 횡성, 여주 쪽으로 전진했고 임부택은 부사단장이 됐고 필자도 사단 작전처로 옮겼다가 부사단장 부관이 됐다.
1951년 4월 사단사령부가 가평 강변에 천막을 치고 전방부대가 사창리에 올라갔을 때 중공군 2개 사단의 인해전술로 6사단은 괴멸 직전 상태로 후퇴했다. 미군사단도 후퇴를 해야했을 때 임 부사단장이 박창원 소령(인사참모) 외 2명과 적지에서 전투 지휘 중 포위되어 후퇴를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무껍질을 뜯어먹으면서 4일을 헤매다가 춘천의 미군진지 앞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미군의 사격을 받았으나 한국군 부사단장으로 판명되어 미군의 도움으로 후송돼 왔다. 장도영 사단장도 겨우 빠져나왔고 호그(Hogue) 9군단장의 질타를 받았다.
6사단은 용문산(1157고지)까지 후퇴하여 사단사령부는 용문산역 근처 벌판에 천막으로 차려졌다. 그리고 2연대 7연대 19연대는 용문산 일대 방어를 위해 배치되었다. 즉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에 대비를 한 것이다.
임부택은 용문산에 배치되어있는 각 연대별로 소대장 이상을 소집시켜놓고 “사주방어 7원칙”을 강의하고 다녔다. 이때는 사병은 물론이고 장교들도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용문산에 가려면 은행나무로 유명한 용문사에서 차를 내려 능선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2~3시간 걸렸다. 그래도 임부택은 뛰다시피 달려 올라갔다. 필자와 헌병 연락병, 둘이서 수행하는데 20세 청년인 필자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 산을 너무 올라다녀 산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곧 5월 중공군 2차 춘계공세가 있었고 중공군은 한 봉우리에 하루 저녁 포탄 10만 발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세계전사 상 최초의 ‘사주방어’에 성공한 것이다. 휴전 후 2차 도미유학을 마치고 원주의 1군사령부로 왔는데 임부택 소장은 참모장이었다. 하지만 해후도 잠깐 그가 곧 미육군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961년 5·16군사혁명이 일어날 때 임부택 소장은 가평의 제1군단장이었다. 미8군의 매그루더(Magruder) 사령관이 작전권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1군 산하 20개 사단 중 몇 개 사단을 통솔할 수 있냐 물어보니 이한림 1군 사령관이 몇 개 사단은 통솔할 수 있고, 몇 개 사단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철저한 군인인 이한림 사령관은 1군 중립을 선언하고 한국군 1군단의 비상대기 명령을 내렸다. 이후 반혁명으로 몰린 이한림 사령관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고 임부택 군단장은 해임, 예비역으로 편입됐다(1962년 3월). 5·16군사혁명이 자리를 잡은 후 임 장군은 병력 동원준비, 반혁명 등으로 몰려 군사재판을 받았는데 아주 드물게도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임부택은 6·25전쟁 참전군인연맹 회장을 지내고 2001년 11월 13일 8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임부택 장군은 정치도 안 하고 자기과시도 안하는 덕장이고 지장이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가 임부택을 사로잡거나 제7연대를 없애버리라고 특별지시를 내릴 정도로 탁월한 지휘력과 용맹성을 발휘했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