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여사의 작고가 한 달이 지났지만 살아 생전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그에 대한 애도와 아쉬움이 새삼 회자되고 있다. 그의 삶이 화려해서가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희생과 봉사 자체였음이 뒤늦게 알려지면서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를 통해 고 여사의 삶을 재조명해 본다.
# 독립운동가 고채주의 손녀
故 고은애 여사(사진=유족 제공)
독립운동가 고채주는 1902년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갔지만 조국이 일본 치하에 놓이자 하와이에서 국민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후 1909년 밀명을 받고 귀국해 고향인 통영에서 통영향교의 수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하와이 국민회의와 상하이 임시정부 사이의 연락책과 군자금 조달 등 지하운동도 했다. 1919년 전국적인 3·1운동, 통영의 4·2운동 등을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며 그때 받은 고문과 형벌의 후유증으로 1920년 순국했다.
고 여사는 부모와 일가 친척으로부터 전해 들은 조부모의 삶을 통해 한국에 대한 사랑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였다고 한다.
# 이태영 총장과 운명적 만남
고은애·이태영 부부(사진=유족 제공)
일제강점기인 1934년, 고은애 여사는 4살 나이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대학 졸업 후 이태영 총장을 만났다. 부친인 고광모는 일본경도교회와 ‘향상사’라는 유치원을 설립해 재일교포들에게 한글과 함께 한국정신, 기독교 정신을 가르쳤다.
고 여사는 같은 경도교회를 다니고 있던 당시 유학생 신분의 이 총장을 교회 장로 소개로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이 총장은 막노동을 하면서 유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고 이때 고 여사는 사랑과 믿음으로 묵묵히 내조하면서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고은애·이태영 부부는 한동안 일본에 머물렀으나 조국의 국민과 장애인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1956년 한국으로 귀국했다. 당시 한국은 6·25전쟁의 상흔이 채 지워지지 않아 성한 사람도 살기 힘든 상황이었으며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치였던 시기였다. 이들의 귀국 결심에 고 여사의 부친과 지인들은 “한국이 너무 가난해 귀국하면 굶어 죽거나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오히려 “이때가 바로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라고 봤다.
장애인들에 대한 교육열은 일본 유학시절에 배운 이 총장의 점자와 고 여사의 수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 부부는 대구광명학교와 영화학교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특수 교사로 재직했다. 줄곧 장애인 기숙사인 ‘라이트하우스’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농·맹아들에게 편물, 무용, 체육 등을 가르쳤다. 일본에서 배운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 故 고은애 여사의 장애인 사랑과 헌신
고은애 여사가 특수교사로 재직 당시 농아인에게 말을 가르치고 있다(사진=유족 제공)
전국농아협회 안추길 회장은 추도사에서 “학생 때 고 여사님의 아름다운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다”며 “그를 만나면서 배움을 알게 됐고 가난에서 벗어나 인생이 바뀌었다”며 고 여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고 여사는 단순히 장애인 교육에만 헌신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을 지도할 교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데 주목하고 이는 대학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판단, 이를 실천하기 위해 당시 소지하고 있던 패물 등 고가품을 모두 팔아 한국사회사업대학교(현 대구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재정적인 뒷받침도 했다.
그의 장애인 사랑은 경력에도 잘 나타난다. 고 여사는 일본 동경농아학교에서 강사를, 대구광명학교와 대구영화학교에서 교사와 교감을, 한사실업전문대학에서 교수와 학장을, 대구대학교에서 교수와 학장을 각각 역임했다. 또 창파재단 대표이사, 학교법인 영광학원 이사, 학교법인 애광학원 이사장, 해외희생동포추념사회사업 이사 등을 역임했다.
이렇듯 고 여사의 경력은 그가 일본과 한국에서 대학 교육과 현장 실습 등으로 40여 년 동안 장애인을 위한 헌신적 삶과 장애인 교육 전문가로 살아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 故 고은애 여사의 회한과 소망
미국에서 고 여사를 마지막까지 모신 3남 이근도 박사는 “모친은 대구대학교가 설립자의 뜻에 따라 운영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또 “고 이태영 총장의 유훈에 따라 영광학원과 대구대학교가 정상화돼야 한다고 했으며, 특히 과거 임시이사체제가 영광학원을 운영하면서 ‘이사 전원이 기독교 신자가 돼야 한다’고 한 법인 정관을 다시 바로 잡아야 재단정상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고 여사는 요양차 미국으로 떠나기 전 먼저 작고한 이 총장의 유지를 실천하려 많은 애를 썼다. 사회복지 법인 ‘창파재단’을 설립해 ‘영천 팔레스’에 장애인들의 평생 생활이 가능한 생활 시설을, ‘영천파파야’에 장애인 직업 재활 시설을 운영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구대학교 경산 캠퍼스에 장애인 복지마을을 만들지 못한 것이 끝내 마음에 짐으로 남는다면서 후손들이 이 사업을 이어받을 것을 당부했다.
고 여사는 30년간 장애인들과 장애인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이들을 위한 교육전문가로서 족적을 남겼다. 학교법인 영광학원과 대구대학교가 설립자의 뜻에 따라 장애인들을 위해 운영돼야 한다는 점을 후손들에게 숙제로 남긴 셈이다.
# 故 고은애 여사 장례식 거행
대구대학교 경산캠퍼스 본관에서 고은애 여사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사진=유족 제공)
고은애 여사의 장례식은 지난달 23일과 24일 대구대학교 대명동 캠퍼스와 경산 캠퍼스, 영천 소재 경북영광학교 등 3곳에 마련된 사전 조문 장소에서 조문이 진행됐고 이후 27일과 28일 대구의료원 국화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았다. 고 여사의 영정은 지난달 29일 아침 일찍 사랑하던 손자의 손에 들려 국화원을 떠나 그가 생전에 몸을 담았던 대구대학교 대명동 캠퍼스, 장애인들과 오랫동안 함께 기거한 장애인 기숙사 라이트하우스, 경산시 소재 미래대학교 교정 등을 들른 후 영결식이 예정된 대구대학교 경산 캠퍼스로 옮겨졌다.
영광학원 학원장으로 치러진 고 여사의 영결식은 지난달 29일 대구대학교 경산 캠퍼스에서 장례예배와 하관예배로 진행됐다. 이날 영광교회 홍민혁 목사가 주도한 장례예배에서는 고 여사를 기억하는 추도사, 생전에 이태영 박사와 함께 고생하면서 장애인들을 위하던 모습이 담긴 동영상 상영, 건내 정상문 시인이 고 여사 영전에 바치는 조사 낭독, 최병길과 김선석 농아들의 수화찬양 등이 이어졌다. 이어 성락교회 배기영 목사 주도로 진행된 하관예배는 고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마음으로 진행됐다. 영결식은 고 여사의 관이 이 총장 옆에 묻히면서 마무리됐다.
고 여사의 장례의 주관은 ▲공동장례위원장 황종동 전 영광학원 이사장, 부광식 전 영광학원 이사, 박윤흔 현 영광학원 이사장 ▲명예장례위원장 함귀용·박영선 전 영광학원 이사 ▲장례집행위원장 김상호 대구대학교 총장, 장길하 대구대학교 총동창회 회장, 최영하 대구대학교 명예교수회 회장 ▲부위원장 배일섭 대구대학교 교수, 김병춘 영광학원 사무국장이 각각 맡았다.
고인의 유족은 이근용(대구사이버대학교 총장), 이근민(애광학원 이사장 겸 대구대학교 교수), 이근도(UCLA연구원), 이예숙(전 미래대학교 총장) 등 3남1녀이다.
남경원 대구/경북 기자 ilyo0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