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발 저린’ 공무원 줄줄이 낚였다
▲ 범행대상 수첩에는 용모 등 피해자의 특이사항이 색깔별로 적혀 있다. |
공무원을 상대로 한 불륜 협박 사건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 피의자가 피해자의 명단과 특이사항을 상세히 수첩에 기록해왔다는 점이 색다르다.
<일요신문>은 피의자가 작성한 수첩을 입수해 그가 지목한 피해대상 및 피해액을 입금한 피해자들의 특이사항을 살펴봤다.
‘○○시청 부시장 A, ○○○과장 2.5 B, 00초등학교 교장 C’
피의자 수첩 두 권과 낱장으로 분리된 메모에는 지역 사무관 이상의 공무원들의 이름과 담당업무, 직통 전화번호 이외에도 빨간 글씨로 숫자와 알파벳 등 암호들이 기록돼 있었다. 몇몇 이름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고, ‘상냥함’ ‘만나자고 함’ ‘개인 연락처를 남김’ ‘비서에게 대신 처리’ ‘어느 모텔인지 확인’ 등의 문구도 더러 눈에 띄었다.
학교장의 경우는 빨간 글씨로 교내에 있는 교직원의 수가 몇 명인지도 기록해 두었다. ‘알려진 대로 대머리’ ‘뚱뚱함’ 등 지역 일간지를 통해 확인한 외모의 특이사항도 빼놓지 않았다.
이번 사건을 담당한 김해 서부경찰서 김한철 팀장은 5월 26일 경찰서를 방문한 기자에게 “피의자는 메모광이라고 할 정도로 꼼꼼하게 자신만의 암호로 피해자에 대한 특이사항을 기록해 왔다”며 “A, B, C는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의 친절도에 따라 등급을 매긴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1.5, 2.5 등의 숫자는 피해자가 ‘금액이 너무 커서 못 보내겠다’고 할 경우 금액을 할인해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수첩에 적힌 내용을 분석해보면 경기 지역은 주로 학교장을 상대로 전화를 걸었고 전라남도 지역은 부시장부터 과장, 면장, 읍장까지 공무원을 상대로 협박을 일삼았다. 협박 대상자의 업무분야는 주로 관광, 문화, 예술, 기업도시개발 등이었다.
피의자의 수첩을 통해 피해사실이 의심되는 공무원들을 상대로 전화를 걸어봤다. 5월 26일 기자와 통화한 전라남도 모 시청 시립미술관 관장 김 아무개 씨는 “남자끼리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니 300만 원으로 깔끔하게 끝내자”고 하더라며 “담당 업무가 여직원이 많은 일이다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인 연락처로 연락을 주든가 만나자’고 하니깐 당장 전화를 끊더라”고 말했다.
모 지역 기업도시개발과 과장 박 아무개 씨는 “이러한 협박전화를 한두 해 받은 게 아니다. 지역으로 발령 나기 전 중앙부처에 있을 때도 ‘인터넷 신문에 사진을 보내겠다’고 전화나 이메일, 편지로 협박을 당했다”며 “너 그때 그 놈 아니냐며 버럭 화를 냈다”고 말했다.
한 공무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증거 여부에 상관없이 공무원에게 불륜 문제는 공직사회의 품위손상에 따른 징계대상이 된다”며 “기관장의 판단에 따라 면직조치가 될 만한 사항이기에 의심이 돼도 일단 당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김한철 팀장은 “현재 15명 정도가 피해자로 보이는데 여비서의 통장으로 입금하거나 다른 친구의 도움으로 입금해 계좌추적이 어렵다. 현재 5명만이 피해사실을 인정했을 뿐 나머지 열 명은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5월 26일 현재 피해사실이 완벽하게 입증되지 않아 영장이 기각된 상태다”고 말했다.
기자가 확인한 결과 피해사실이 밝혀진 5명의 절반은 지역의 과장급 공무원이었고, 나머지는 학교장이었다.
김해 서부경찰서에 따르면 피의자 김 씨의 공무원 상대 사기행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는 5년 전에도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당시 공무원들을 상대로 불륜 협박 전화를 일삼아 모두 53명에게 1억 3000여만 원의 돈을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의 이러한 사기행각은 논산의 한 공무원이 그와의 통화내용을 녹음한 파일을 관할 경찰서에 넘겨 수사를 요청하면서 수면위로 부상했다. 당시 김 씨는 3년의 실형을 살게 됐지만 증거사실을 보낸 공무원 이외에는 단 한 명의 피해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갈취한 1억 3000여만 원도 피해사실이 입증되지 않아 압수되지 않았다.
김 씨는 협박을 받은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피해사실을 알리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악용했다. 그는 5년 후 “돈 벌기 쉽다”는 이유로 또다시 같은 방식의 범죄를 준비했다. 수법도 진화했다. 과거 공중전화를 통해 협박전화를 했던 것을 대포폰으로 바꿨고, 계좌추적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모집해 입금될 때마다 15만 원을 주는 조건으로 쉽게 타인 명의의 대포통장을 마련했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10년 전 함께 과일 행상을 했던 황 아무개 씨에게 연락해 그의 1톤 트럭을 이동수단으로 삼아 하루에도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범행에 쓰인 대포통장은 돈이 입금되면 전액을 뽑은 후 폐기처분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공모자 황 씨는 그의 운전기사 역할을 하는 조건으로 한 달에 300만 원의 월급을 받았다. 그는 경찰조사에서 “사업이 망한 후 자녀들 학비 문제로 한 달에 300만 원 정도 월급 형태로 돈을 받는 조건으로 운전수 노릇만 했다”고 진술해 석방조치됐다.
5월 26일 김해를 방문한 기자는 김해 중부경찰서로 송치된 김 씨와의 면회를 시도했지만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대신 김 씨는 담당경찰을 통해 “비리나 수주계약 건 등 다른 내용의 협박을 했을 때는 공무원들이 콧방귀도 끼지 않더라. 오직 여자문제를 언급할 때만 순순히 돈을 보냈다”는 말을 전했다.
현재 김 씨는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 팀장은 “김 씨는 진술 과정에서 이번에는 한 5년 정도 살다 나오지 않겠느냐. 김해 공무원과 학교장을 괜히 건드렸다”며 범행 일체에 대해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선수끼리 빨리 처리하자”며 되레 조속한 수사를 바라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김해=손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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