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요정처럼 때론 요부처럼
벌써 그녀가 스무 살짜리 아들을 둔 엄마가 되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연기력을 인정받거나 강한 흥행 파워를 지닌 배우는 아니었지만 피비 케이츠는 1980년대 사춘기 소년들의 여신이었고 꿈에 나타나는 ‘몽정의 모티브’였다.
사실 그녀가 배우로 활동했던 시기는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7세에 첫 영화 <파라다이스>(1982)의 현장으로 나갔고 1980년대에 꾸준히 활동하긴 했지만 1989년에 26세의 나이로 16세 연상의 배우 케빈 클라인과 결혼하면서 그녀는 사실상 활동을 접었다. 특별 출연 형식으로 등장한 <결혼기념일에 생긴 일>(2001)이 거의 10년 전 영화이니, 이젠 완전히 영화계를 떠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다. 할리우드에 수많은 미녀 스타와 글래머 보디들이 명멸했지만 피비 케이츠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피비 케이츠의 육체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귀여움과 섹시함, 순수함과 요부스러움이 공존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중국계 필리핀 사람이었고, 그의 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러시아계 유태인이었다. 이 묘한 혈통의 조합은 동서양의 아름다움이 황금비율로 배합된 듯한 이목구비를 만들었고, 여기에 시원하면서도 아기의 순수함을 지닌 미소와 깊은 눈망울이 더해졌다. 마르지도 뚱뚱하지도 않은 그녀의 몸은 글래머러스하면서도 균형 잡혀 있었고 군살 없이 탱탱했다. 그녀는 1980년대 최고의 ‘섹시한 피조물’이 되었다.
모델로 활동하다가 영화계로 진입한 피비 케이츠의 첫 영화는 <파라다이스>였다. 노예 상인의 습격으로 사막에서 데이비드(윌리 메이어스 분)라는 소년과 오아시스를 전전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춘기 소녀 사라. 브룩 실즈의 무인도 판타지 <블루 라군>(1980)을 저렴하게 표절한 ‘오아시스 판타지’지만 <파라다이스>엔 <블루 라군>에 없는 것이 있었다. 브룩 실즈가 미성년임을 내세워 철저하게 몸을 사린 반면, 피비 케이츠는 아낌없이 아름다운 누드를 드러냈다.
<리치몬드 하이스쿨>(1982)의 그 유명한 풀장 신은 남성 판타지계의 신드롬이 되었다. 이 영화에서 브래드(저지 라인홀드 분)라는 녀석은 린다(피비 케이츠 분)를 상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한다. 슬로모션으로 풀장에서 갓 나와 물에 젖은 머리를 턴다. 빨간 비키니를 입은 그녀는 브래드를 보고 갑자기 가슴을 드러내고 브래드에게 키스를 한다. 무아지경에서 손 운동을 하던 브래드가 그 광경을 린다에게 들키는 현실로 코믹하게 마무리되긴 하지만, 이 장면은 틴에이저 남성들이라면 한번쯤은 떠올렸을 법한 판타지다. 여기서 중요한 건 판타지의 중심에 피비 케이츠가 있다는 사실. 묘한 비현실성을 지닌 그녀의 외모는 판타지에 박차를 가하며 상상만으로도 저릿저릿한 전율을 준다.
하지만 두 편의 영화 이후 피비 케이츠는 조금 움츠러든다. 판타지의 대상으로 허깨비처럼 살아가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프라이빗 스쿨>(1983)의 마지막 졸업식 장면에서 살짝 엉덩이를 보여주는 걸 끝으로 그녀의 육체는 봉인된다.
다행인 것은 이후 그녀가 지독한 슬럼프에 빠지거나 슬럼프를 벗어나려 너저분한 섹스 영화에서 착취되지 않고, 조용히 하지만 우아하게 은퇴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우리에겐 ‘아름다운 피비 케이츠’의 이미지만이 남았고, 그렇게 그녀는 우리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판타지로 영원할 수 있게 되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