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스피드건 유망주 ‘쏙쏙’
“요즘엔 흥이 나질 않아요. 예년만 해도 유망주 고르는 맛에 힘든 줄도 모르고 일했는데.”
4월 29일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가 열리는 목동구장을 찾았을 때 모 프로야구팀 스카우트는 본부석 중앙을 바라보며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본부석 중앙엔 미 메이저리그(MLB) 스카우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손엔 스피드건, 다른 한 손엔 볼펜을 쥔 그들은 흡사 고속도로에서 과속을 측정하는 교통경찰처럼 보였다.
“고속도로에서 150km/h를 밟았더니 당장 벌금 딱지를 뗍디다. 여긴 시속 150km/h를 던지면 그 순간 미국행 항공권이 쥐어져요. 애들이 팔이 빠지라 150을 던지려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어요. 그러다 정말 팔이 빠질 수도 있는데 막는 사람이 없어요. 대한민국 아마추어 야구 현실이 그렇습니다.”
1994년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고 LA 다저스와 계약한 박찬호(뉴욕 양키스) 이후 지난해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입단한 문찬종까지 해외진출에 성공한 유망주는 총 47명이다. 1999년 김병현, 송승준(롯데), 최희섭(KIA), 오철희, 권윤민(KIA 스카우트), 서정민 등 6명이 한꺼번에 MLB 구단에 입단했을 땐 그야말로 해외진출 붐을 이뤘다.
그러나 2002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한 동의대 정성기를 끝으로 유망주의 미국행은 뚝 끊겼다. 박찬호, 김병현을 제외하고 빅리그에서 출세한 한국인 메이저리거가 눈에 띄지 않은 까닭이었다. 국내 구단의 계약금 베팅이 높아진 것도 해외 진출 자제의 한 이유였다. 2006년 신일고 남윤희가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하며 MLB 진출 불씨를 살려 놓긴 했지만, 계약금 6만 5000달러의 마이너 계약이라 주목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뒤. 전면드래프트가 최초로 시행된 2009년, ‘제2의 해외진출 붐’이 일었다. 무려 13명의 고교생 유망주가 MLB에 진출한 것이다.
MLB 스카우트와 에이전트의 공세 속에 갈수록 유망주 스카우트가 어려워지는 현실이 모 스카우트의 목을 죄어오는 것일까. 모 스카우트가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스카우트? 씨도 안 먹힐 소리…에이전트는 또 무슨…저 작자들 다 고엽제에요. 프로야구의 텃밭인 아마야구를 고사시키는 고엽제란 말입니다”하며 언성을 높이는 게 아닌가.
베테랑 스카우트인 그가 발끈한 이유가 궁금했다. 사실 MLB 스카우트들이 본부석 중앙을 차지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에이전트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는 그래도 보이지 않는 신사협정이 있었어요. 하지만, 2009년부터 한 구단에서 유망주들을 싹쓸이하길 시작했어요. 에이전트들 역시 학부모들한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며 아이들을 빼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컵스는 5명의 유망주를 싹쓸이했다. 올해도 덕수고 에이스 김진영과 계약하며 8개 구단 스카우트의 공적이 됐다. 야구계 일부에서 “한국 고교야구가 컵스의 ‘우물’이 됐다”며 자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컵스의 성공에 자극받아선지 목동구장을 찾는 MLB 스카우트도 증가했다. 대통령배 대회에는 10명 이상의 MLB 스카우트가 본부석에 진을 쳤다. 놀라운 건 고교 유망주를 노리는 이가 미국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27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군산상고-광주일고 전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일본프로야구(NPB) 모 팀 소속의 스카우트였다. 그는 “볼일 있는 김에 (목동구장까지) 들렀다”라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우연히 들른 사람치곤 손에 든 스피드건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본 프로구단은 한국 아마추어 선수 영입에 소극적이었다. 1996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조성민이 거의 유일한 일본 진출 유망주였다. 한국 유망주의 일본 진출이 적었던 건 한·일 선수협정 탓이 컸다.
KBO와 NPB 사이에 맺은 한·일 선수협정 7조엔 ‘프로구단의 아마추어 선수 계약에 관하여 한국과 일본구단은 양국의 규약과 규정을 존중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사실상 양국 아마추어 선수의 이동을 막은 것이다. 조성민 이후 유망주들이 일본 대신 미국을 선택한 것도 한·일과는 달리 한·미 선수협정에는 아마추어 선수 관련 조항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일본 모 구단의 스카우트는 어째서 목동구장을 들른 것일까. 야구계에선 “편법 스카우트를 하기 위해서”란 말이 돌고 있다. 여기서 편법 스카우트는 일본 야구 유학을 말한다. 그러니까 고교 1, 2학년 가운데 괜찮은 선수를 중퇴시킨 뒤 일본 고교에 전학시키고 졸업 후 사회인야구나 독립리그에 잠시 뛰게 한 다음 1군으로 올린다는 뜻이다. 다소 복잡하지만, 한·일 선수협정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한국인 유망주를 스카우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아마추어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막으려고 지난해 4월 말 한층 강화된 제재안을 발표했다. 한국 프로구단 선수로 등록한 적이 없이 외국 프로구단에서 뛰었던 선수는 외국 구단과 계약 종료 이후 국내 구단과 선수로 2년간 입단 계약을 할 수 없다는 기존 조항에 지도자로서도 7년간 입단 계약을 금지하는 조항을 추가했다. 사실상 국내 U턴을 원천봉쇄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부 야구전문가는 “제재가 능사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보단 전면드래프트제를 전처럼 1차 지명제도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에선 강력한 제재나 제도 개혁에 앞서 8개 구단이 스카우트 부분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한 해 200억 원이 넘는 구단 운영비 가운데 스카우트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7~8% 사이다. MLB와 NPB의 운영비 대비 스카우트비가 22~30%임을 고려할 때 턱없이 낮은 수치다. 그래서일까. 취재 말미에 한 현직 스카우트는 이렇게 고백했다.
“베팅 없는 드래프트는 무의미하다. 좋은 선수를 스카우트하려면 그만한 돈을 써야 한다. 그러나 계약금 규모가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구단은 제품개발비 없이 신상품으로 떼돈 벌겠다는 사이비 기업과 다를 게 없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