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버 좋고 감독님 좋고 자, 사고 한번 쳐보자
▲ 황선홍 부산 아이파크 감독은 인터뷰에서 월드컵에서 뛸 후배들에 대한 기대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월드컵은 그의 마음 속에서 과거형이 아닌 진행형이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원정에서 한국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16강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주심의 오심과 경기 운영 미숙으로 기회를 놓친 게 너무 속상했어요. 제가 좀 월드컵에 한이 많은 편이잖아요. 아마 그래서 더 감정이 격해졌던 것 같아요.”
지난 14일, 부산 강서체육공원 내에 위치한 부산 아이파크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황선홍 감독은 기자가 4년 전의 일을 상기시키자 잠시 회상에 잠기며 당시의 심정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2002년 월드컵 때 내 나이가 35세였는데 지금 43세인 걸 보면 시간 참 빠르네요. 하긴 (박)지성이가 주장하는 거 보면 진짜 격세지감을 느낀다니까”라고 말한 뒤 한참을 웃었다.
―축구선수 황선홍은 2002년 전 까지만 해도 ‘월드컵’ 하면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없었다. 워낙 축구팬들의 화살받이로 공격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대표팀에서 10년 넘게 골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았어요. 94년 미국월드컵 때 볼리비아전이 최고였죠. 그때 결정적인 실수를 하는 바람에 ‘똥볼’ ‘개발’ 황선홍이 된 거예요. 그래서 2002년이 저한테는 너무나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 잡아요. 만약 2002년 폴란드전에서의 첫 골이 없었다면 ‘한국축구대표팀의 공격수 황선홍’은 빈손으로 은퇴를 했을 테니까요. 폴란드전 끝나고 도핑검사 받으러 가는 (고)정운이 형한테 축하한다는 전화가 왔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형, 사람은 죽으라는 법은 없나봐”라고요.
―2002년은 히딩크 감독, 2006년은 아드보카트 감독이 월드컵을 맡았었다. 지금 월드컵대표팀을 이끄는 허정무 감독에 대해 큰 기대와 사소한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팬들은 성적을 내는 것에만 관심을 갖겠지만 지도자 입장에서는 어떤 형식의 축구가 펼쳐질지가 더 궁금해요. 그런 면에서 허정무 감독님이 많이 부담스러우실 거예요. 본인이 잘해야 다른 한국 감독에게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 거란 의식도 하실 것이고요. 그런데 지난 번 코트디부아르 경기를 보니까 대표팀을 잘 만들어 놓으셨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기 자체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그 정도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번 월드컵은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도 생길 것 같아요.
―코트디부아르 경기 전에는 대표팀이 어떤 모습으로 비쳤나.
▲처음에는 뭔가 구색이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워낙 단시간 내에 선수들을 잘 장악하시기 때문에 가면 갈수록 대표팀이 안정감 있게 보이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이번 월드컵 직전에 치르는 스페인과의 평가전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 같아요. 코트디부아르전처럼 경기를 운영해 나간다면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에서 좋은 흐름을 갖고 갈 수 있다고 봐요.
―지금 대표팀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대 어느 월드컵보다 해외파의 비중이 상당히 크다. 월드컵을 뛰었던 선배로서 살짝 부러움도 생길 것 같은데.
▲너무 부럽죠. 이런 선수들과 같이 한 번 더 뛰어보고 싶기도 하고(웃음). 우리가 월드컵에서 실패를 많이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경험 미숙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유럽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많다 보니 그들이 대표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들의 자신감, 당당함이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아요.
―대표팀 수비에 대한 지적이 많다. 홍명보 유상철 김태영과 같은 무게감이 없다보니 더 불안한 시선으로 보는 것 같다.
▲코트디부아르전처럼 포백을 염두에 둔다면 수비를 그냥 수비수들한테만 맡기면 굉장히 위험해져요. 상대 선수들이 워낙 개인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라 막연히 포백라인에서 중앙수비 라인만 수비라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죠. 무엇보다 미드필더와의 협력 플레이가 중요해요. 만약 4-4-2를 쓴다면 여덟 명이 수비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황선홍 감독은 남아공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에서 맞붙는 그리스가 세트피스나 공중전에 상당히 능하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의 역할이 분명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번 대표팀 선발 명단에 안정환 선수가 포함돼 있다. 그의 역할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나.
▲조커로서의 역할로는 충분하다고 봐요. 조커는 경기 흐름을 바꾸거나 아니면 결정을 해줄 때 필요한 존재인데 정환이가 그 몫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문전 앞에서의 골 결정력만큼은 정환이를 능가할 선수가 없잖아요. 정환이가 투입되면 수비수 몇 명은 끌고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드필더 쪽에서 공격해 들어오기가 훨씬 수월해지죠.
―K리그에서의 부진한 모습으로 인해 골키퍼 이운재 선수의 대표팀 발탁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내가 보기엔 한 선수한테만 지속적인 신뢰감을 보여주는 게 문제일 수도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전폭적인 믿음이 필요한 시기예요. 사람이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한두 경기 때문에 그 선수 전체를 폄하하는 건 무리가 있어요. 코칭스태프가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더 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월드컵을 눈앞에 둔 대표팀을 위해선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는 황선홍 감독. 사진제공=부산 아이파크 |
▲그건 전적으로 허정무 감독님의 판단이에요. 만약 (김)영광이나 (정)성룡이가 주전으로 뛰고 싶다면 감독님의 마음이 바꿀 수 있게끔 노력해야죠. 나도 감독이지만, 선수가 예뻐서 게임에 내보내는 건 절대 아니거든요. 그만큼 신뢰가 가니까 출전시키는 거예요. 감독의 마음을 바꾸는 건 선수가 얼마만큼의 노력과 능력을 보여줬느냐입니다.
―남아공월드컵 대표팀 주장이 박지성 선수다. 2002년 월드컵 때 선후배로 만난 사이라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지금 지성이 나이가 몇 살이죠? 와, 언제 서른 살이 됐어요? 내가 서른다섯 살 때 대표팀 막둥이였는데(웃음). 지금도 지성이가 마냥 어리게만 보이거든요. 젊은 혈기에 대표팀 들어와서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는 후배였고, 항상 후배로만 머물 줄 알았는데 어느새 주장이니, 고참이니 하니까 격세지감을 느껴요.
―박지성 선수가 이번 월드컵을 마치고 대표팀에서 은퇴한다고 밝혔다. 알고 있었나?
▲정말이에요? (한참 생각에 잠기다) 지금 은퇴하는 건 너무 아쉽다. 박지성 없는 대표팀은 상상이 안 가니까요. (웃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을 때까진 뛰어야죠. 난 서른다섯까지 오기로 버틴 거고, 지성이는 2002년, 2006년 모두 잘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좋은 모습 보이면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 싶거든요. 지성이를 대신할 만한 후배가 나타난 다음에 은퇴해도 되지 않을까?
황선홍 감독은 박지성의 대표팀 은퇴 발언에 대해 진한 아쉬움을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장시간 비행기 타고 날아와서 하루 있다가 게임 뛰고 다음날 출국해서 소속팀 경기에 합류하는 생활의 반복은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며 박지성과 이청용, 박주영의 정신력에 찬사를 보냈다.
―월드컵 첫 골은 누가 넣을 것 같나.
▲(박)주영이요. 베스트11으로 나갈 가능성이 가장 큰 선수죠. 그런데 월드컵에선 공격수보다 미드필더들이 골을 더 많이 넣더라고요. 원톱으로 설 경우 고립이 되다 보니까 2선에 있는 선수들한테 찬스가 더 많이 나거든요.
―이동국 선수도 (첫 골에 대해)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물론 그렇죠. 그러나 동국이는 월드컵에 대해 굉장한 부담을 갖고 있을 거예요. 이번 월드컵에서 어떤 성적을 내느냐에 따라 ‘국내파’로만 인식될지, 아니면 세계무대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달라지게 되니까요.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다스리는 거예요. 내 능력이 80인데 100을 만들려 드는 건 오버예요.
내가 갖고 있는 80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도록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해요. 주전으로 뛴다면 찬스 한두 번은 반드시 나오게 돼 있어요. 그것만 집중해서 잡아내겠다고 마음먹으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중간 중간에 이천수 선수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선배로서 이천수 선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한마디로 너무 안타까운 선수죠. 정말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좀 더 빨리 방법을 찾았어야 해요.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팀을 알아본다든가, 전남을 찾아가 용서를 구한다든가 해야지, 그냥 가만 있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천수처럼 재능 있는 선수가 사라진다는 건 한국 축구에 있어 분명 마이너스예요. 너무 아깝잖아요. 월드컵에 가고 싶었다면 일찍 문제를 해결하고 털어 버렸어야죠. 그리고 지금 축구장에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본인이 스스로를 낮추고 자기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죠.
―만약 황선홍 감독이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라면 베스트 11을 어떻게 구상할 지 궁금하다.
▲먼저 수비에는 (이)영표, (조)용형, (곽)태휘, (차)두리이고요, 미드필더에는 (박)지성, (기)성용, (김)정우, (이)청용, 그리고 (박)주영과 (이)동국이라고 할 수 있겠죠.
황선홍 감독은 지금 선수들의 면면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지만 이 화려함이 어떤 팀워크를 형성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선수들 모두 월드컵에서 사고 한번 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선후배가 희생과 인내를 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충고도 덧붙였다. 황선홍 감독한테 ‘월드컵’은 ‘과거형’이 아닌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그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황선홍이 박지성에게 쓰는 편지
막둥아, 부담감도 너의 복이란다
인터뷰를 하면서 솔직히 박지성이란 이름과 ‘주장’ ‘고참’ ‘은퇴’란 단어가 조합이 안 되는 걸 자주 느꼈다. 어느새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나한테 박지성은 여전히 ‘막둥이’인데, 난 프로팀 감독이 됐고 넌 대표팀 주장으로 변모한 부분을 보면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보다.
부산 아이파크 감독을 맡기 전 영국 프리미어리그 연수를 위해 맨체스터 근교에 머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도 보고 너랑 식사하며 많은 얘길 주고받았던 게 기억난다. 그때 내가 고백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선수 생활하면서 가장 좋아했던 팀이 맨유였어. 2006년 월드컵이 끝난 뒤 네가 맨유에 입단한다는 기사를 보고 처음엔 ‘뻥’이라고 생각했었다. 정말 미안하다. 나한테 맨유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우리랑은 한 차원 다른 선수들이 뛰는 무대라고 인식돼 있었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지성이가 다른 팀도 아닌 맨유에 입단한다는 내용은 쇼킹, 그 자체였기 때문이야. 솔직히 말해서 난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트래포드를 한 번 밟아보는 게 소원이었거든. 그런데 지성이 넌 매일 밟고 있잖니^^.
지성아, 많이 힘들고 부담스럽지? 워낙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라 지금의 얼굴 표정으로는 가늠이 안 되지만, 유난히 책임감이 강한 넌 분명 밤이면 밤마다 월드컵을 떠올리며 선수들과 어떻게 팀워크를 이뤄 나갈지 고민을 많이 할 거라고 생각한다. 후배들이 워낙 널 ‘신’처럼 생각하니까 선배들의 지원 사격을 받고 네가 중심을 잘 잡아간다면 이전 대표팀 못지않은 팀워크를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네가 이번 대표팀을 끝으로 은퇴한다는 얘길 듣고 많은 생각이 오가더라. 오죽 힘들었으면 미리 은퇴를 공표했을까 싶기도 하고 대표팀을 생각하면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 욕심이 너무 큰가?
난 박지성이란 좋은 선수가 한국대표팀에 좀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네가 없는 대표팀은 상상이 안 가.
난 많이 행복하다. 박지성이란 좋은 후배가 있어서, 그리고 널 본보기 삼아 축구에 열정을 갖고 달려드는 후배들이 많아서….
대표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보니 부담이 백배는 더하겠지만 그 또한 너의 복이라고 생각해라. 난 박지성이 이끄는 남아공월드컵 대표팀이 2002년 때와 같은 기적을 또 한 번 일궈냈으면 좋겠다. 부담은 갖되, 부담에 지진 말아라. 월드컵 경험이 없는 후배들이 긴장과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너의 많은 국제대회 경험을 얘기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지성아, 난 원래 뒤돌아보거나 과거를 곱씹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너만 보면 내가 딱 20년만 젊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정말 나쁜 짓 안 하고 축구만 열심히 할 텐데 말이야. 그렇게 하면 나도 너처럼 맨유에서 뛸 수 있을까?^^
부산 아이파크 감독 황선홍
부산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