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통산 27번째 기록, 21세기에만 19회…최고령 이병규, 최연소 신종길, 클리닝 타임 전 기록 정진호·오윤석
롯데 내야수 오윤석은 지난 10월 4일 KBO리그 역대 27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메이저리그(MLB)에서 쓰는 공식 용어는 ‘히트 포 더 사이클(Hit for the cycle)’이다. 하지만 KBO리그는 일본에서 건너온 ‘사이클링 히트’를 오래 전부터 통상적인 명칭으로 사용해왔다.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일본식 옛 야구 용어들을 미국식 용어들로 바로잡았지만, 사이클링 히트는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히트 포 더 사이클’이 너무 길고 복잡하다는 의견이 많아서다. 이 기록은 KBO 레코드북에도 공식적으로 ‘사이클링 히트’라고 명시돼 있다.
#무명의 오윤석, 사상 첫 ‘만루포 사이클링 히트’
사이클링 히트는 최근 다시 한 번 뜨거운 화제가 됐다. 롯데 자이언츠 내야수 오윤석이 올 시즌 2호이자 KBO리그 역대 27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오윤석은 10월 4일 부산 한화 이글스전에 1번 타자 2루수로 선발 출전해 1회말 2루타, 2회말 단타, 3회말 홈런, 5회말 3루타를 연이어 터트렸다.
이 기록은 특히 사상 최초로 만루홈런이 포함된 사이클링 히트여서 더 큰 관심을 끌었다. 한 타석도 건너뛰지 않고 첫 네 타석에서 기록을 완성한 것도 총 7번밖에 없던 일이다. 육성 선수 출신인 오윤석은 데뷔 이후 가장 빛나는 하루를 보내면서 단숨에 야구팬에게 이름을 알렸다.
사실 사이클링 히트는 하늘이 행운을 내려줘야 만들 수 있는 진기록이다. 올해로 39년째인 KBO리그 역사에서 단 27번만 이 기록이 나온 이유다. 이승엽, 이종범, 장종훈, 이만수, 한대화, 장효조 같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타자들도 사이클링 히트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은퇴했다. 오히려 오윤석처럼 주전으로 뛰지 못하던 선수들이 사이클링 히트의 행운을 잡는 일이 더 많다.
#최초 주인공은 오대석, 2호는 5년 뒤 이강돈
KBO리그 역대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는 삼성 라이온즈 오대석이 만들어냈다. 1982년 6월 12일 부산(구덕) 삼미 슈퍼스타즈전에서 1회초 3루타, 3회초 2루타, 5회초 단타, 6회초 2점 홈런을 각각 쳤다. 프로야구 원년에 나온 역대 최초의 사례였으니, 당사자인 오대석과 동료들 모두 사이클링 히트라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조차 몰랐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역대 2호 사이클링 히트가 나오기까지는 그 후 5년 2개월이 더 걸렸다. 1987년 8월 27일 빙그레 이글스 이강돈이 잠실 OB 베어스전에서 두 번째 사이클링 히트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얄궂게도 바로 나흘 뒤 3호 기록이 작성돼 이강돈의 스포트라이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롯데 자이언츠 정구선이 그해 8월 31일 인천 청보 핀토스전에서 역대 3호 사이클링 히트를 완성했는데, 최초로 첫 네 타석 만에 달성된 기록이라 더 눈길을 모았다. 그 후 빙그레 강석천(1990년 8월 4일), OB 임형석(1992년 8월 23일)이 각각 3년과 2년 간격으로 뒤를 이었다.
‘LG 레전드’ 이병규는 역대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양준혁과 테임즈, 2회 달성 주인공
다시 2년이 흐른 1994년 4월 16일에는 LG 트윈스 서용빈이 부산 롯데전에서 여섯 번째 이정표를 세웠다. 단국대를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한 첫 시즌이라 역대 신인 사상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로 기록됐다. 삼성 양준혁은 1996년 8월 23일과 2003년 4월 15일에 두 차례 달성해 역대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에 두 번 성공한 주인공이 됐다. 상대팀이 두 번 다 현대 유니콘스였다는 점도 재미있는 인연이다.
양준혁 이후 사이클링 히트 2회에 성공한 선수는 NC 다이노스 외국인 타자였던 에릭 테임즈(현 MLB 워싱턴 내셔널스)가 유일하다. 테임즈는 심지어 2015년 KIA 타이거즈(4월 19일)와 넥센 히어로즈(8월 11일)를 상대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해 최초의 한 시즌 2회 기록을 추가했다.
외국인 선수 최초 기록은 2001년 삼성에서 뛴 매니 마르티네스가 보유하고 있다. 그해 5월 26일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역대 9호이자 외국인 첫 사이클링 히트를 만들어 냈다. 그 다음 주인공이 바로 테임즈였고, KIA 로저 버나디나(2017년)와 KT 위즈 멜 로하스 주니어(2018년)가 그 뒤를 이었다. 로하스는 KT 창단 이후 처음으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타자로 기록됐다.
#최고령 이병규와 최연소 신종길
한화 이글스 신종길은 2004년 역대 최연소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남겼다. 그해 9월 21일 대전 두산 베어스전에서 20세 8개월 21일의 나이로 단타, 2루타, 3루타, 홈런을 모두 쳤다. 신종길 역시 올해의 오윤석처럼 무명 선수였다가 진기록의 주인공이 돼 이름을 알렸다.
반대로 LG 트윈스 이병규는 역대 최고령 기록 보유자다. 38세 8개월 10일이던 2013년 7월 5일 목동 넥센전에서 네 타석 만에 기록을 완성했다. ‘안타 제조기’로 불렸던 현역 시절 명성에 비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 기록이었다. 다만 이병규는 이날 3루타를 추가하기 위해 전력질주로 베이스를 돌다 햄스트링에 통증이 올라와 이후 몇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아픔도 겪어야 했다.
한화 정진호는 두산 시절이던 2017년 6월 7일 잠실 삼성전에서 역대 최초로 5회가 끝나기 전에 사이클링 히트를 완성하는 진풍경을 남겼다. 1회말 2루타, 2회말 3루타, 4회말 단타를 각각 때려낸 데 이어 5회말에는 홈런까지 보탰다. 최소 이닝과 최소 타석 사이클링 히트를 동시에 해낸 셈이다. 지금까지 클리닝 타임 전에 사이클링 히트를 해치운 선수는 정진호와 오윤석밖에 없다.
#1·2군 동반 달성한 안치용, 그 후계자는?
안 그래도 쉽게 나오지 않는 기록인데, 단타-2루타-3루타-홈런을 순서대로 치는 일명 ‘내추럴 사이클(Natural cycle)’은 더 보기 드물다. KBO리그에 역대 단 한 명뿐이다. 역대 7호 주인공인 롯데 김응국이 1996년 4월 14일 부산 한화전에서 우전 안타-우월 2루타-중월 3루타-좌월 홈런 순으로 기록을 만들어냈다. 가장 쉬운 것부터 가장 어려운 것까지 차례로 쌓아 올린 셈이다.
LG 안치용은 역대 유일하게 1군과 2군에서 모두 사이클링 히트를 해낸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2군에서 뛰던 2003년 4월 15일 상무전에서 달성한 뒤 1군에 몸담은 2008년 6월 26일 삼성전에서 또 사이클링 히트에 성공했다.
2군에서는 1995년 6월 6일 LG 이동우를 시작으로 그동안 30차례 사이클링 히트가 나왔다. 1군보다 13년 늦게 사이클링 히트 기록이 시작됐지만, 달성 사례는 세 차례 더 많다. 올해는 LG 외야수 한석현이 9월 23일 SK 와이번스와 2군 경기에서 1회초 2루타, 2회초 3루타를 친 뒤 4회초 한 이닝에 안타와 2점 홈런을 한꺼번에 해결해 2군 통산 30번째 사이클링 히트를 완성했다.
현역 선수 중엔 두산 김재환이 상무에서 뛰던 2010년 5월 7일(경찰야구단전)과 7월 27일(SK전)에 두 차례 2군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적이 있다. 이 외에도 2010년 LG 문선재, 2011년 두산 최주환(당시 상무), 2012년 롯데 민병헌(당시 경찰야구단), 2016년 NC 권희동(당시 상무)과 넥센 임병욱, 2017년 KIA 백용환, 2019년 키움 김은성이 2군에 사이클링 히트 기록을 남겼다. 이들이 1군에서도 사이클링 히트에 성공한다면, 안치용에 이은 역대 2호 영예를 남길 수 있다.
#5회 달성한 삼성과 두산, 한 번도 없는 SK
삼성과 두산은 사이클링 히트를 총 다섯 차례씩 만들어낸 최다 기록 팀이다. 삼성은 통산 1호 오대석과 외국인 1호 마르티네스, 2회 달성자 양준혁 외에 2016년 최형우(현 KIA)가 한 차례 더 해냈다. 두산(전신 OB 포함) 소속으로는 앞서 언급한 임형석과 정진호 외에 이종욱(2009년), 오재원(2014년), 박건우(2016년)가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롯데, LG, 한화(전신 빙그레 포함)는 3명씩이다. 롯데는 정구선과 김응국에 이어 올해 오윤석이 추가됐다. LG는 서용빈, 안치용, 이병규가 기록을 남겼고, 한화는 이강돈, 강석천(1990년), 신종길이 포함됐다. KIA(전신 해태 포함)는 왕조를 구축했던 화려한 역사에 비해 사이클링 히트 수가 적다. 해태 시절엔 한 명도 없고, KIA로 이름을 바꾼 뒤 김주찬(2016년)과 버나디나가 성공해 2명뿐이다.
SK는 10개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사이클링 히트 기록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팀이다. 역사가 짧은 9구단 NC(테임즈)와 10구단 KT(로하스)도 한 명씩 배출했지만, SK 타자 가운데선 아직 한 명도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선수가 없다. 재미있는 점은 유일하게 다른 팀 타자에게 사이클링 히트를 허용한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SK 입장에선 작은 위안거리다.
#27번 중 19회가 21세기 기록, 올해도 벌써 2회
총 27번의 사이클링 히트 가운데 19번이 21세기에 나왔다. 2000년 이전에는 사이클링 히트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시즌이 훨씬 많았다. 원년부터 첫 19년간 단 8차례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1년 마르티네스와 전준호(현대)의 한 시즌 동반 사이클링 히트를 시작으로 조금씩 페이스가 빨라졌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간 6명의 타자가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2009년 이종욱 이후 4년의 공백이 생기기도 했지만, 2013년 이병규의 기록 달성과 함께 침묵이 깨지면서 매년 사이클링 히트가 나오기 시작했다. 2016년(김주찬, 박건우, 최형우)과 2017년(넥센 서건창, 정진호, 버나디나)엔 두 시즌 연속 세 타자가 기록의 주인공이 되는 ‘사이클링 풍년’도 벌어졌다.
2018년 로하스를 끝으로 지난 한 시즌을 건너 뛰었지만, 올해 다시 사이클링 히트 행진이 재개됐다. 키움 히어로즈 김혜성이 5월 30일 고척 KT전에서 올 시즌 처음이자 역대 26호 기록을 달성했고, 4개월 뒤 오윤석이 깜짝 소식을 전해 뒤를 이었다. 2011년 이래 10년간 무려 13회의 사이클링 히트가 그라운드를 수놓은 셈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