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게 피어나는 젊음에선 죽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데 어느새 죽음의 그림자가 생명을 감싸며 차츰차츰 소멸을 준비한다.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가 나고 여기저기 아프다. 죽음이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다. 생성된 모든 것은 소멸하고 태어난 모든 것은 죽지만, 그렇다 해도 스스로 힘이 빠지기 전 생명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여전히 생명이다. 나이 들수록 건강검진을 열심히 하는 것도 그 때문 아닌가. 그러니 스스로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기 전에 맞이하게 되는 죽음은 가장 큰 상실이고, 가장 큰 두려움이다.
문수스님이란 분이, 그 소중한 생명을 바쳐 소신공양을 했다. 지난 5월 31일 오후 2시 30분경, 신고를 받은 119구조대와 경찰이 출동해보니 그 때 스님은 이미 가부좌를 한 채 불길에 휩싸여 있었단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다.
소신공양이란 스스로 몸을 태워 온몸을 부처님(진리)에게 바치는 것이다. 평소 걸음걸이 하나도 허투루 해서는 안 된다며 과묵하게 수행해왔다는 스님이 스스로 자기 몸을 태워야 했을 만큼 절박했던 서원은 무엇이었을까? 문수스님은 유서를 통해 4대강 사업을 중지할 것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그런데 그보다도 내 시선을 끈 것은 유서의 마지막이었다. 도반 스님들의 이름을 부르며 “후일을 기약합시다”라고 썼던 마지막 문장! 나는 그 문장 때문에 그것이 분신자살이 아니라 소신공양임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문장은 며칠 동안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죽는 사람이 후일을 기약한다고 쓸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죽음에 절망하고 늙음을 두려워하고 병고(病苦)를 멀리하려 한다. 이 짧은 생이 전부라 믿으니 쉽게 쾌락에 빠지고, 젊음을 동경하며, 행운을 쫓고, 화폐물신에 사로 잡혀 99세까지 88하게 사는 게 목적이 된다. 돈의 노예, 시간의 노예, 몸의 노예, 젊음의 노예, 권력의 노예로 평생 끌려 다니는 것이다.
“후일을 기약합시다.”
문수스님은 이 삶이 전부가 아님을 보고 느끼고 믿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이 삶 이후의 삶을 믿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우리가 그의 소신공양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잘한 일”이라고 칭찬할 수도 없고, “잘못된 일”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넘어서 있는, 혹은 그 이전의 일이기에.
문수스님은 낙동강 줄기에서 몸을 바쳤다. 4대강 사업으로 강의 생태계가 처참하게 무너져가는 곳이다. 불교에서는 생명의 차별이 없다. 모두다 중생이고, 모두 다 부처다. 스님은, 강물에 몸을 의탁해 생명을 이어가는 뭇 생명들이 포클레인의 날카로운 이빨 아래 죽어가는 것을 보고 무던히도 마음이 아렸나보다. 자비의 마음이 일어 어렵게 결단하신 모양이다.
‘나’의 생명을 던져 뭇 생명들의 삶터를 보존할 수 있다면, 하고. ‘나’의 생명은 그렇게 던져지는 게 아닌데, 그의 그 숭고한 뜻 앞에서 나는 그저 부끄럽고 부끄럽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