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우리+산은’ 메가뱅크설 솔솔
어윤대 KB금융 회장 내정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경영학과 2년 후배다. 정부 출범 이전부터 이 대통령과 교감이 두터웠던 어 내정자는 정부 초기부터 장관 후보 등으로 줄곧 거론돼 왔다. 올 3월엔 한국은행 새 총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청와대에선 어 내정자를 요직에 앉히려 할 때마다 그의 재산 문제 등 도덕성 시비가 불거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어 내정자의 종착지는 결국 KB금융이었다. 그러나 어 내정자의 KB금융행은 관치금융 논란에 직면한 정부나 낙하산 꼬리표를 달게 된 어 내정자에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어 내정자 발탁이 이뤄진 배경엔 정부의 강력한 메가뱅크 설립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현 정부 초기 ‘메가뱅크 전도사’를 자처했던 최중경 전 기획재정부 차관이 지난 3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돌아오고 금융권 M&A설이 활발해지면서 메가뱅크 설립 논의 또한 수면 위로 부상 중이다.
어 내정자의 KB금융행으로 KB금융과 우리금융(이팔성 회장) 하나금융(김승유 회장) 등 금융권 M&A 주체가 될 금융지주사들의 회장 자리가 모두 고려대 동문의 친 MB계 인사들로 채워진 상태다. 이들은 그동안 저마다 은행권 M&A의 중심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혀온 까닭에 이들의 정치적 배경이 주목받기도 했다.
아직까지 메가뱅크 설립 추진을 공식화하지 않고 있지만 정부가 내심 바라는 메가뱅크는 한두 은행의 결합이 아닌 서너 곳의 합병을 통한 세계 50위권의 은행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금융권에선 “친 MB 성향 금융권 수장들이 M&A 대상을 나눠먹는 게 아니라 한 곳이 독식하는 형태의 M&A가 이뤄지도록 정부가 유도할 것”이란 견해가 나오기도 한다.
금융권에선 어 내정자가 이끌게 된 KB금융이 향후 M&A 판도를 주도하게 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사전 내정설까지 나돌았을 만큼 정치적 부담이 컸음에도 KB금융 회장추천위원회가 어 내정자를 회장 후보로 밀어붙인 배경엔 그만큼 정부 차원에서 KB금융 측에 힘을 실어줄 것이란 물밑 공감대가 깔려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어 내정자가 은행 세 곳의 사외이사 경력 외에 마땅한 은행 근무 경험이 없다는 점 또한 논란거리다. 어 내정자의 전문성 논란을 부추기는 대목이지만 이는 정부가 잘 짜놓은 M&A 구상을 ‘정권 친화적’으로 평가받는 어 내정자가 누구보다 잘 받들 것이란 관측을 낳게 한다.
아직 정식 취임도 하지 않은 어 내정자의 M&A 전략은 꽤나 구체적이다. 어 내정자는 지난 15일 회장 내정 직후 기자들과 만나 “우리금융에 관심이 있다” “외환은행엔 관심 없다” “산업은행에도 관심이 있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우리금융에 대해선 “지분 맞교환 방식으로 사들인다면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밝혔으며, 외환은행에 대해선 “인수하는 데 5조~6조 원이 드는데 국내 은행 중 현금이나 채권으로 이를 조달할 수 있는 곳이 없을 것”이라 설명했다. 산업은행에 대해선 “산은금융지주가 대우증권을 갖고 있다”며 사업 다각화를 위해 산은 인수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어 내정자의 이 같은 발언은 “정부가 ‘KB+우리+산은’ 형태의 메가뱅크를 구상하고 있으며 외환은행은 해외 자본에 대한 매각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관측을 낳게 한다. 메가뱅크 논의의 지나친 확산을 우려한 듯 어 내정자는 16일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금융 인수하면 산업은행 살 여력이 없다”고 밝혔지만 ‘KB+우리+산은’ 합병 시나리오는 이미 금융권을 달굴 만큼 달궈놓은 상태다.
한편 어 내정자의 회장 후보 선출을 전후로 우리금융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는 점 또한 금융권의 눈길을 끈다. 지난 2001년 지주사 창립 이후 처음 받는 세무조사다. 국세청이 올 들어 주요 증권사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벌인 만큼 우리금융 세무조사를 올해 재개된 금융권 세무조사 연장선상의 일환으로 보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이를 우리금융 민영화에 앞선 ‘길들이기 작업’으로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은 그동안 은행권 M&A에서 ‘우리금융 역할론’을 역설해왔다. 민영화를 앞둔 우리금융이 M&A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게 아니라 M&A 판도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금융권 일각에선 ‘이번 세무조사가 향후 벌어질 금융권 대형 M&A에서 우리금융이 큰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금융 M&A 의지를 밝혀온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이 어 내정자와 향후 어떤 기 싸움을 벌일지도 주목을 받는다. 김 회장은 지난 17일 서울 가리봉동 ‘지구촌 사랑 나눔’을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의 M&A 관련 질문에 “M&A는 규모보다 핵심 역량을 키우고 시너지를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며 어 내정자의 M&A 발언을 의식한 듯한 답변을 내놓았다.
고려대 경영학과 61학번으로 이 대통령과 동기생인 김승유 회장의 우리금융 인수 의지 역시 그동안 금융권의 눈길을 끌어왔다. 그런데 KB금융에 MB계 핵심인 어 내정자가 수장으로 들어선 데다 하나금융 자산규모(192조 원)가 325조 원의 KB금융에 크게 못 미치는 점 때문에 향후 대형 M&A전에서 주도권이 KB금융으로 기울 가능성이 조심스레 전망되고 있다.
어 내정자의 정치적 배경이 KB금융의 우리금융 인수를 통한 외연확대를 도모하는 데 커다란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형 M&A 추진을 통한 당장의 큰 출혈과 정부 개입 여지가 커지는 것에 외국인을 중심으로 한 KB금융 주주들의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구조조정을 우려하는 KB국민은행 노동조합 역시 어 내정자의 M&A 구상에 벌써부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은행 현장 경험이 전무한 어 내정자가 대형 M&A 구상을 풀어 가는 데 그가 지닌 정치적 후광이 어떤 역할을 할지 금융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