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이 날 발표된 구제책은 이헌재 재경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가 취임한 이후 신용불량자에 관해 발표된 대책 중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몇몇 은행들이 일부 채무자에 대해 기간연기 등을 골자로 한 대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지 않은 채 지원한 적은 있었지만, 이 날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몇몇 은행들은 보도자료까지 내는 등 노골적으로 신용불량자에 대한 구제책을 알렸고, 또 다른 은행은 10만 명이 넘는 신용불량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는 등 무척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업계의 시각이 곱지만은 않다. 특히 총선이 끝난 지금 재경부나 시중은행들은 총선 전 발표한 신용불량자(신불자) 구제책의 현실방안 마련에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지난 12일 가장 먼저 신불자 대책을 내놓은 곳은 부산은행이었다. 부산은행 여신기획팀은 “다른 금융기관에 채무가 없는 소액채무자(30만원 이하)를 대상으로 채무를 1백% 감면하고, 신용불량정보도 해제키로 했다”고 밝혔다.
부산은행 관계자는 “이 구제책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결국 부산은행에 30만원 이하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사람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채무를 변제받고 자동적으로 신용불량자 명단에서 제외된다는 말이다.
같은 날 오후 국민은행은 신용불량자 12만 명에게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비슷했다. 국민은행 NPL팀의 주관으로 보낸 이 편지에는 “기존의 채무를 최장 8년 동안 분할 상환토록 하고, 또 기존의 금리였던 20%대가 아닌 6~15% 수준으로 금리를 적용한다”고 명시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연체이자도 분할 상환할 수 있으며, 소액대출자에 대해서는 채권을 포기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소액대출이란 국민카드의 경우 10만원 이하, 국민은행 가계대출의 경우 50만원 미만이라고 이 관계자는 설명했다.
하나은행도 마찬가지. 이 날 저녁 하나은행은 “채무자들이 빚의 일부를 갚으면, 나머지는 좋은 조건으로 장기 분할을 통해 상환토록 해준다”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은행이 내놓은 대책을 보면, 내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결국 은행에 빚진 소액의 금액은 안 갚아도 된다는 것이고, 나머지 채무에 대해서도 불투명한 상황인 것.
그동안 재경부를 비롯, 정부가 은행들로 하여금 신불자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할 것을 누누이 강조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일이 전혀 뜻밖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관계자들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은 시기나 방법 등이 뭔가 석연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시중은행들이 같은 날 시차를 두고 이 대책이 발표한 배경이 무엇이냐는 것. 더욱이 이 날은 4·15총선 사흘 전이었다.
은행 관계자에 따르면 은행연합회 주관으로 신불자에 대한 대책회의가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지난달 중순경. 당시 시중은행들은 여러 은행에 채무를 지지 않은, 한 곳에만 빚을 진 사람에 대해서는 은행이 독자적으로 판단해 채무를 탕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용의 회의를 열었다.
당초 은행측에서는 이에 대해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은행의 한 관계자는 “신불자 대책이 시급한 것은 알고 있지만, 은행으로서는 받을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수익과 직결되는 얘기여서 많은 얘기들이 오갔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결국 이 날 회의는 은행의 ‘자체판단’으로 넘어갔고, 한 달여가 지난 12일 시중은행들이 일제히 대책을 발표한 것. 더욱이 시중은행들은 예전과 다르게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가 하면, 신불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중은행이 내놓은 대책 중 소액 채무 변제는 당초 고려되지 않았던 사항으로 알고 있다”며 “사실상 빚진 사람들에게 10만원, 50만원짜리 돈봉투를 돌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게다가 이른바 호남지역의 토착은행인 광주은행, 전북은행 등이 이번 신불자 대책에서 전격 제외된 것도 뭔가 석연치 않다는 분위기다.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섰던 부산은행, 국민은행, 하나은행 등은 모두 총선 때 접전지역으로 분류된 지역에 기반을 둔 은행. 국민은행은 서울,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 점포를 대거 확보하고 있고, 부산은행은 경남지역에서, 하나은행은 충청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은행이다.
특히 시중은행들이 같은 날 신불자 대책을 발표한 데는 재경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번에 대책을 내놓은 은행의 한 관계자는 “재경부는 그동안 신불자 중에서도 여러 은행에 채무가 있는 다중채무자에 대해서도 대책을 마련할 것을 요청했다”며 “신불자 대책에 전혀 동참하지 않는다고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아니냐”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재경부로부터 각 은행들에 협조를 당부하는 언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며 “굳이 당시에 발표할 이유는 없는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어쨌든 총선 직전 발표한 신불자 대책을 두고 재경부는 물론 시중은행들은 사후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빚을 탕감해주는 조치 외에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점 때문에 시중은행들은 속앓이만 하고 있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신불자 대책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돈을 안 받겠다는 조치 외에 더 실질적인 방안이 없지 않느냐”며 “그러나 돈을 안 갚아도 된다면 금융질서는 물론 국가신용도도 문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결국 이헌재 경제팀이 주도해 발표한 이번 신불자 대책안은 앞으로 경제는 물론 정부 정책의 발목을 잡는 또다른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해법을 찾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