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유사시마다 요긴하게 쓰이는 이 퇴역 군용담요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이 누옥(陋屋)에 입주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이삿짐 사이에 묻어서 들어 왔거나 가전제품 대리점에서 왔던 배달원이 두고 간 것인지도 모른다. 털 빠진 군용담요라지만 납품 당시의 제1차적인 임무를 다하고 민간으로 퇴출되었다뿐이지 겉보기엔 아직도 멀쩡하다. 털이 빠지지 않았음은 물론 모포의 제원(諸元)을 밝힌 표지도 선명하다. <제조 회사명;H합섬섬유공업주식회사, 재질;폴리아크릴(카시미론), 중량;1700g, 제조연월일;1981년 모월 모일>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다는 30년 세월이면 품질 좋은 모포라도 용도 폐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라 살림이 어려워도 장병들에게 모포 한 장을 30년 동안이나 쓰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보니 집 안에 굴러들어온 담요도 구멍이 뚫리거나 털이 빠져서가 아니라 규정으로 정해진 사용연한이 다 되어서 용도폐기된 것이리라. 말 못하는 담요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국군장병의 침구로 부족함이 없이 충실하게 ‘근무’해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퇴출당하는 운명이 되었으니 억울하기도 하리라. 그동안 장병 개개인의 관물함에서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떠받들어지던 모포가 하루아침에 민간으로 퇴출되어 여염집 집구석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으랴.
하기야 중도퇴출이 억울한 게 어찌 군용담요뿐이겠는가. 평생직장으로 알고 근무하던 회사에서 구조조정이니 희망퇴직이니 해서 한참 일할 나이에 보따리 싸고 나가야 하는 신세가 어디 한 둘인가. ‘사오정’이니 ‘삼팔선’이니 해서 보따리 싸는 연령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65세니 60세니 하는 정년이 보장되던 ‘신이 내린 직장’도 요즘엔 철밥통이니 뭐니 하는 따가운 시선 때문인지 무슨 평가를 합네, 삼진아웃이네 해서 밀어낼 구실을 만들고 있다. ‘하늘아래 두 발 뻗고’ 지낼 평생직장은 이제 영원히 사라질 모양이다.
싫든 좋든 우리네 인생도 이모작(二毛作), 삼모작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다. 한 가지 재능만으로 평생을 먹고 살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래 봬도 왕년에…”하며 회전의자가 아니면 안 가겠다는 허영도 버려야 한다. 이모작 인생으로 새 출발 하려면 ‘잘나가던’ 일모작 시대를 잊어야 한다. 병영의 질서정연한 관물함에서 퇴출되어 ‘타짜’들의 화투판 밑받침이나 이삿짐 깔개로 전락한 ‘털 빠진 군용담요’를 비웃지 말라. 어쩌면 털 빠진 담요야말로 쓰임새에 따라선 현역 일모작 시대보다 더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모작 삼모작 시대에 이 털 빠진 군용담요의 교훈을 한 번쯤 음미해 볼 만하지 않는가.
이광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