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현상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여성운동(feminism)의 관점을 따르는 듯하다. 우리 사회에선 나이 든 사람이 권위를 지니는 문화가 자리 잡아서,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는 여성과 나이의 권위가 조화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재미있는 얘기지만, 이런 해석은 설득력이 작다. 장유유서의 문화가 아직 남아있는 부분들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나이가 바로 권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위계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지만 그런 사정은 높은 위계에 오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지 나이 자체가 권위를 부여한 때문은 아니다. 나이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노인들이 모두 백발을 검게 염색하고 모두 젊은 모습을 그리도 열심히 추구하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나 나이 든 여성과 젊은 남성의 조합은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부정적인 반응을 얻는다. 실제로 노인과 소녀 사이의 사랑은 상투성(stereotype)을 띨 만큼 흔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이 현상을 우리 사회의 고유한 문화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어떤 현상을 문화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리 깊은 설명은 못 된다. 그런 문화가 나오게 된 생물적 바탕에 대한 설명이 따라야 비로소 설명이 온전해진다. 모든 문화적 현상은 생물적 바탕을 지닌다.
이 논점을 다루려면 우리는 결혼의 목적이 아이들을 낳아서 기르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현대인들이 그렇게 높이 여기는 남녀의 사랑도 결혼을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진화했다. 나이 든 여성과 젊은 남성의 결합이 비난받는 까닭은 그런 결합은 아이들을 낳아서 기르지 못하고, 그래서 결혼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좋은 아빠가 될 젊은 남성이 불모의 결혼에 얽매이는 것은 일단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비록 우리가 그런 사정을 이내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진화한 본능에 따라 그렇게 판단한다.
바로 그것이 사람의 남성이 젊은 배우자를 얻으려고 그리도 애쓰는 까닭이다. 평생 한 배우자와 맺어지므로 그로선 배우자의 긴 가임기(可姙期)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사람과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진 침팬지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침팬지 수컷은 발정한 암컷의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반면에 젊은 여성은 좀 나이가 들었어도 재력이 있는 남성을 선호한다. 그런 남성이 자식들을 잘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나이 든 남성과 젊은 여성의 결합에 대한 반응은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
결혼은 우리 마음을 다듬어냈다. 이것은 문화가 유전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문화 공진화’의 가장 두드러진 예다. 사회 현상을 잘못 진단하고 엉뚱한 처방을 내놓을 위험을 줄이려면 우리는 우리 마음이 진화한 과정을 잘 살펴야 한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