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앞에서 도토리 키재기
▲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 |
이번 재보선은 총 8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말 그대로 ‘미니 총선’. 서울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에 대통령 최측근의 출마라는 정치적 상징성이 더해져 서울 은평을 재선거 결과는 7·28 재보선 승패를 좌우할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
관건은 야권이 6·2 지방선거에서처럼 ‘단일대오’를 형성할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게 중론이지만 현재로선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 6·2 지방선거 승리로 ‘배 부르고 등 따뜻해진’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등이 서로 ‘네가 양보하라’며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상과 지역 기반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한 초거물급 여권 후보를 상대해야 하는 야권은 과연 다시 한 번 ‘후보단일화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7·28 재보선을 맞은 야권에게 서울 은평을 선거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재오 전 위원장은 이명박 정부 창출의 1등 공신이자 야권이 그렇게도 반대해 온 ‘4대강 사업의 전도사’다. 지난 2007년 대통령선거에 앞서 대운하 건설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몸소 자전거를 타고 주요 강들을 탐방했던 장본인이다. 야권으로선 지방선거 당시 불 붙였던 ‘MB(이명박 대통령) 심판론’을 이어감으로써 정국 주도권을 확실히 쥐기 위해서라도, 또 여권에 4대강 사업 반대 여론을 재확인시켜주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를 꺾어야 하는 입장인 셈이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가 이 전 위원장이 출마선언을 한 바로 다음날인 지난 2일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4대강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고 포문을 열고 나선 것도 이 같은 절박함을 반영하는 제스처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까지 야권이 보여주는 모습은 ‘대어’를 잡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지방선거 승리의 후광효과에 힘입어 출마를 희망하는 예비후보들은 줄을 잇고 있지만 다들 ‘이재오 대항마’로 내세우기엔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우선 민주당에선 장상·윤덕홍 최고위원과 이계안 전 국회의원, 고연호 지역위원장, 최창환 전 이데일리 사장, 송미화 전 서울시의원 등이 출사표를 던졌다. 국민참여당에선 ‘노무현의 대변인’이었던 천호선 최고위원이 출마선언을 하고 표밭갈이에 나섰다. 지방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선거에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했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는 등 총력전 태세다. 민주노동당에서도 이상규 서울시당위원장의 출마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후보 난립’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상황이지만, 민주당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영입설’과 ‘징발설’이 나오는 것은 이들 출마 희망자들의 본선 경쟁력이 미덥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최근 민주당이 자체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당내 출마 희망자 전원이 이재오 전 위원장의 지지도에 크게 못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선 조국 서울대 교수, 엄기영 전 MBC 사장, 신경민 앵커,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 등의 영입설, 손학규 전 대표와 김근태 전 의원 징발설이 나온다. 급기야 미디어법 반대 투쟁 등을 이끌며 ‘MB 저격수’로 자리매김 한 최문순 의원 투입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그러나 이에 대해 “당사자들 견해와 무관한 아이디어 수준일 뿐”이라며 실현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인물 대결에서의 약점을 상쇄하려면 선거 구도를 ‘MB 대 반(反)MB’, ‘4대강 대 반4대강’ 식의 세력 대결로 몰고 가야 하지만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 전국 단위 선거였던 지방선거와 달리 이번 재보선에선 야당들끼리 서로 주고받을 카드가 마땅치 않다. 더욱이 재보선의 하이라이트를 내주지 않으려는 민주당과 이번 선거를 당세 확장의 계기로 삼으려는 국민참여당 등의 이해관계가 정면충돌하는 양상이다.
정세균 대표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이재오 전 위원장은 ‘4대강 전도사’로, 4대강 반대 진영의 단일후보로 대결하겠다”고 밝혔지만, 4대강 반대 진영을 어떻게 단일대오로 묶어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정 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가 ‘민주당이 서울 은평을 재선거를 국민참여당에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만약 이길 확률이 높은 후보가 (다른 당에서) 나오면 검토할 수는 있겠지만 (유시민 전 장관이 야권 단일후보로 나섰다 낙선한) ‘경기도 학습효과’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야권 후보 단일화가 성사되더라도 국민참여당 후보로는 이재오 전 위원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민주당 관계자도 “국민참여당 천호선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되면 이재오 전 위원장을 꺾을 수 있다는 주장이 맞다면 민주당의 어떤 후보를 내세워도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참여당도 “서울 은평을만큼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1월 창당 당시 2만 5000명에 불과했던 당원이 4만 500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당세가 확장되고 있는 만큼 원내 진출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는 원외정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왔다는 점도 ‘대승적 결단’을 막는 장애요인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8개의 재보선 선거구 중 민주당 몫이었던 5곳을 제외한 나머지 선거구에 대해선 민주당이 양보해야 한다”며 “그렇게 해서 다시 한 번 ‘단일화의 힘’을 보여 달라는 게 국민들의 열망”이라고 강조했다. 양순필 국민참여당 대변인은 “최근 자체 조사 결과 천호선 후보의 인지도가 45%에 달했다”며 “(민주당에서 거론되는) 다른 어떤 후보들보다 천 후보의 경쟁력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각 야당들의 ‘버티기 싸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 결과가 반드시 후보 단일화로 이어질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이재오 전 위원장의 영향력과 지역 기반을 고려할 때 후보 단일화 없이 야권 후보가 승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란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지방선거 참패의 위기 앞에서 하나로 뭉쳤던 야권이 다시 한 번 ‘솔로몬의 지혜’를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