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링 고단한 짐 또 안타까운 죽음
▲ 배기석 선수가 경기기 후 의식불명으로 긴급 후송돼 뇌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사망했다. 그의 운구가 부산 영락공원 장례식장으로 옮겨진 가운데 추모객들이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배기석의 어려운 환경도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배기석은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도 헤어진 뒤 어렵게 자랐고, 지금도 낮에는 선반기계공으로 일하며 할머니와 대학생 동생을 부양하고 있는 말 그대로 ‘생계형 헝그리 복서’였다.
이번 사건이 터지자 선수 안전 대책, 불과 수십만 원에 불과한 대전료, 척박한 프로복싱 환경 등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병원비와 장례식 비용조차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권투위원회(KBC)의 선수건강기금(대전료의 1% 적립)이 고갈됐다는 등 KBC 시스템에 대한 고발도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많은 복싱인들은 근본적인 원인을 존립 근거까지 위협받고 있는 심각한 프로복싱의 인기 저하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즉, 흥행이 안 되다 보니 돈이 없고, 돈이 없다 보니 끔찍한 사고를 예방할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KBC는 충격적인 최요삼의 세계타이틀매치 사망 사건 이후 ‘선수 개인별 의무 검진 카드 작성’, ‘37세 이상의 경우 컴퓨터단층촬영(CT), 자기공명영상(MRI) 의무 제출’, ‘경기 전날 메디컬테스트의 혈압, 맥박, 동공 등 정밀 체크’ 등 안전 문제에 한층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스템에 걸려 경기가 취소되기도 했다.
배기석의 경기 당시 링 아나운서를 맡았던 황현철 KBC 홍보이사는 이런 설명을 곁들였다.
“복싱 선진국이라고 하는 일본에서도 2000년 이후 거의 매년 사망 사건이 나오고 있다. 일본은 선수들이 의무적으로 MRI 검진 자료를 내는 등 안전 관리에 세밀하게 신경 쓰고 있는데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한국이나 일본이나, 복싱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프로복서를 전업으로 하는 선수가 많지 않다. 이렇다 보니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링에 올라간 선수에게 불의의 사고가 터지는 것이다.”
즉 아무리 안전 규정을 강화해도 기본적으로 과거 복싱 전성기 때와는 달리 몸이 안 되는 선수들이 링에 오르다 보니 사고가 계속 터지고 있다는 것이다.
KBC는 현재 경기규칙에서 ▲3경기 연속 KO(TKO)패를 당할 경우 진단서를 제출한 뒤 KBC의 승인을 받고 나서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 ▲KO(TKO)로 패할 경우에는 50일, 일반적으로는 경기 종료 후 15일이 지나야 다음 경기에 출전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3일과 4월 27일 연속으로 KO패를 당한 배기석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황 이사는 “재정적인 문제도 있다. 경기수가 적고, 대전료가 적다 보니 대전료의 1%를 적립하는 KBC의 선수건강보호기금도 각종 병원비를 내느라 적립하기가 힘들 정도로 금세 빠져나간다. 보험이라도 마련하고 싶어 국내의 거의 모든 보험회사를 찾아다녔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고 최요삼 선수의 충격이 원체 컸던 까닭에 현재 KBC는 할 수 있는 모든 안전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즉, 돈이 많이 드는 고액의 메디컬테스트를 실시하면 사고위험을 조금 더 줄일 수 있지만 현재처럼 복싱이 인기가 없고, 재정적인 뒷받침이 안 된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 WBA슈퍼페더급 챔피언 출신으로 K-1에서도 활약한 바 있는 최용수(최용수복싱클럽 대표)는 “이번 사건으로 복싱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고, 또 더 나아가 가뜩이나 어려운 환경에서 운동하는 후배들이 더 고통을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라고 토로했다.
▲ 연합뉴스 |
WBC페더급챔피언을 지낸 지인진도 “배기석은 신인왕전 준우승을 차지한 기대주였는데 복싱에만 전념하지 못해 성장이 늦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운동을 하다 이런 일을 당하니 정말 눈물이 난다. 주위에서 복서들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KBC는 신용선 부회장을 장례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23일 발인을 진행하는 등 고 배기석 선수의 장례를 부산지회장으로 진행했다. 신 위원장은 “김주환 KBC 회장이 사비를 털어 병원비를 지급했고, 건강보호기금 규정에 따라 적립된 지원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그리고 유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모금운동도 진행 중이다”라고 밝혔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
빈소에서 만난 고인의 흔적들
‘힘들어도 언제나 웃음 많은 친구였다’
지난 21일 숨진 ‘비운의 복서’ 배기석의 빈소가 마련된 부산 영락공원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지인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빈소 앞에는 고 배기석의 동생 배기웅 씨가 침통한 표정으로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형 몫까지 할머니를 모셔야겠다”며 입술을 깨무는 배 씨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고향인 부산에서 형을 보내고 싶어 대전 을지대학병원에 안치돼있던 시신을 부산 영락공원으로 운반해왔다고 한다.
배기석이 세 살, 동생 배기웅 씨가 한 살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할머니 주옥순 씨가 둘의 보호자가 됐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할머니는 안 해 본 일이 없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힘든 상황을 함께 견뎌왔다. 배기석의 한 친구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밝혔다. “밝은 친구였다. 힘들다는 말을 쉽게 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긍정적이고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 몰랐는데….”
배기석은 초등학교 때 권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었지만 장남으로서 어려운 가정형편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또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계속했다. 직장생활과 운동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복싱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의 작은아버지는 “고인만큼 복싱을 사랑한 사람도 드물 것”이라며 입을 열었다. “기석이는 가족 몰래 시합 일정을 잡고 숙모에게는 이틀 전에, 할머니에겐 하루 전에 살짝 알려주곤 했다. 시합에 나갈 때마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돼 돌아오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당장 권투를 그만두라고 호통치곤 했다. 그때마다 ‘이번만이요, 진짜 마지막이에요’라며 웃는 얼굴로 집을 나서곤 했다.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네 몸이 건강해야 하지 않느냐’며 나 역시 복싱을 그만두길 권유하곤 했다. 일이 이렇게 돼버리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와 함께 운동을 하던 동료들 역시 믿기지 않는단 반응이었다. “월급이나 대전료를 받으면 한 푼도 남김없이 집에 가져다주고 입버릇처럼 동생을 걱정하던 따뜻한 형이었다. 모든 동료들이 기석이를 좋아했다. 옆에 있으면 내 맘까지 따뜻해지는 그런 친구였다.”
한편 배기석이 어머니처럼 따른 할머니는 손자의 죽음을 알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쓰러지셨고 결국 빈소에 나오지 못하고 집에 몸져누워있는 것으로 알려져 조문객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부산=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
‘힘들어도 언제나 웃음 많은 친구였다’
지난 21일 숨진 ‘비운의 복서’ 배기석의 빈소가 마련된 부산 영락공원에는 그를 추모하기 위한 지인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빈소 앞에는 고 배기석의 동생 배기웅 씨가 침통한 표정으로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형 몫까지 할머니를 모셔야겠다”며 입술을 깨무는 배 씨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고향인 부산에서 형을 보내고 싶어 대전 을지대학병원에 안치돼있던 시신을 부산 영락공원으로 운반해왔다고 한다.
배기석이 세 살, 동생 배기웅 씨가 한 살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할머니 주옥순 씨가 둘의 보호자가 됐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할머니는 안 해 본 일이 없다.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힘든 상황을 함께 견뎌왔다. 배기석의 한 친구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밝혔다. “밝은 친구였다. 힘들다는 말을 쉽게 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긍정적이고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줄 몰랐는데….”
배기석은 초등학교 때 권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었지만 장남으로서 어려운 가정형편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또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계속했다. 직장생활과 운동을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복싱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의 작은아버지는 “고인만큼 복싱을 사랑한 사람도 드물 것”이라며 입을 열었다. “기석이는 가족 몰래 시합 일정을 잡고 숙모에게는 이틀 전에, 할머니에겐 하루 전에 살짝 알려주곤 했다. 시합에 나갈 때마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돼 돌아오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당장 권투를 그만두라고 호통치곤 했다. 그때마다 ‘이번만이요, 진짜 마지막이에요’라며 웃는 얼굴로 집을 나서곤 했다.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데 네 몸이 건강해야 하지 않느냐’며 나 역시 복싱을 그만두길 권유하곤 했다. 일이 이렇게 돼버리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와 함께 운동을 하던 동료들 역시 믿기지 않는단 반응이었다. “월급이나 대전료를 받으면 한 푼도 남김없이 집에 가져다주고 입버릇처럼 동생을 걱정하던 따뜻한 형이었다. 모든 동료들이 기석이를 좋아했다. 옆에 있으면 내 맘까지 따뜻해지는 그런 친구였다.”
한편 배기석이 어머니처럼 따른 할머니는 손자의 죽음을 알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쓰러지셨고 결국 빈소에 나오지 못하고 집에 몸져누워있는 것으로 알려져 조문객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부산=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