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대선 나라도 양보했어야 했다’
▲ 2009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 옆에 마련된 ‘추모의 벽’에 많은 시민들이 사연을 남겼다. |
섬마을 소년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엮은 1권에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민주화시대가 열리기까지 70여 년간 위정자들의 폐단과 그로 인해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비참한 상황들이 재현되어 있다. 특히 옥중과 망명지에서, 연금된 자택에서 구상한 여러 정책들에서는 대한민국에 대한 그의 열정과 비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2권에는 ‘대통령 취임부터 서거 직전까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대통령 당선이후 닥친 국가 부도위기 극복과 IT강국실현에 대한 의지, 6·15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 수상, 2002년 월드컵 개최 등 재임기간 동안의 갖가지 ‘국정보고서’가 담겨 있다.
자서전은 출생과 어머니에 관한 고백으로 시작된다. 숱한 루머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DJ는 자서전을 통해 “내 어머니는 둘째부인이었고 나는 서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그동안 이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평생 작은댁으로 사신 어머니의 명예를 지켜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를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고, 나 또한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영원한 동지’ 이희호 여사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희호의 매력은 은은함에 있었다. 그녀는 이지적이고 활달했지만 교만하지 않았다. 미래가 보장된 여성 지도자였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겸손했다. 1962년 3월 어느 날 저녁 탑골공원에서 결혼해달라고 말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는 5월의 신부가 되어 내게로 왔다.”
생사의 고비에서 예수님을 만난 얘기도 있다. DJ는 1973년 중앙정보부 공작원들에 의해 도쿄에서 납치되어 공해상에서 수장될 위기에 처했던 상황을 회고하며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 상어에게 하반신을 뜯어 먹혀도 상반신만으로라도 살고 싶다. 죽음 앞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을 봤고, 그의 옷 소매를 붙들고 살려달라고 사정했다”고 밝혔다.
▲ 대통령 시절 청남대에서 이희호 여사와 휴가를 즐기는 모습(위)과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오열하는 모습. |
1980년 9월 17일 선고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당시의 절박한 심정도 담겨 있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제발 사형만은 면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재판장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봤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었고 입술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징역이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었다. 재판장의 입이 찢어졌다. ‘김대중 사형.’”
DJ는 극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기결수 신분으로 머리가 깎일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적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죽음을 면한 데 대한 기쁨 때문이었다. 죽음이 무서웠다. 판결을 기다리는 몇 달 사이 몸무게는 10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사형제에 대한 소견도 눈길을 끈다. 그는 “법의 오심 또는 정치적 의도에서 사형제를 악용하는 예도 빈번했다. 사형집행을 아무리 강행해도 범죄는 줄지 않고 증가하는 추세마저 보이고 있다. 사형집행은 생명만 헛되게 말살시킬 뿐 사회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형수가 개과천선한 실례는 무수하게 많다. 환경, 교육, 신앙심, 자신의 노력 등에 따라서 얼마든지 천사가 악마를 누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된다”며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
전남 신안 출신인 DJ의 각별한 ‘호남사랑’도 엿볼 수 있다. “호남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DJ는 “차별받는 호남인들을 위해 할 일을 제대로 못해 늘 가슴이 아팠다. 지역감정을 선동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고향인 전라도를 찾는 데 많이 망설였고 가지 않았다”고 적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DJ가 박사학위를 취득한 과정도 담겨 있다. “나는 사실 ‘대학 콤플렉스’가 있었다. 6대 국회 때 나는 재정경제위원회에 속했는데 재경위는 경제학 박사, 전직 경제관료 등 쟁쟁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가 상임위 활동을 제대로 할지 두려울 정도였다. 나는 열심히 연구하고 준비했다. 충분한 연구와 준비로 재경위 소속 의원은 물론이고 국민과 언론도 나를 주목했다. 그러다 정책위 의장까지 맡게 됐다. 나는 대학을 다니지 못한 콤플렉스에 눌려 지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개발의지로 승화시켰다. 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박사학위는 받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명예박사가 아닌 정식 박사를 논문과 구두시험을 통해 러시아 국립 외교대학원에서 얻어냈다.”
5공화국 말인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당시 야권 후보 단일화 실패에 대해서는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고 자성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 물론 단일화했어도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저들의 선거부정을 당시로서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 잘못했다.”
1995년 정계복귀를 결심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평생 품었던 내 꿈을 실현해 보고 싶었다. 그 하나는 민주주의 국가 완성이요, 다른 하나는 민족 통일에 이바지하고자 함이었다. 인생은 어차피 한 번 사는 것인데, 한 번 결심했으니 그 끝을 보자고 다짐했다. 나는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다.”
6공화국 말과 김영삼 정부 시절 ‘야당 총재’였던 DJ의 정치자금과 관련해 세간엔 ‘20억+알파’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는 14대 대선 즈음 DJ가 노태우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은 ‘사건’에서 비롯됐는데 당시 상황에 대한 그의 진솔한 심경도 고백돼 있다.
“김중권 정무수석이 그 돈을 내놓았을 때 나는 많이 놀랐다. 다른 모든 후보들에게 대통령이 인사를 하는 거라 하기에 믿었다. 사실 현직 대통령의 격려금을 뿌리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당시는 정치자금법이 없었기 때문에 법에 저촉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돈은 받아서는 안 될 돈이었다. 국민들에게 고백은 했지만 내 정치 인생에서 돈과 관련된 추문이었으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1998년 6월 16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은 것과 관련된 소회도 담겨있다. “정 회장은 통이 큰 만큼 추진력도 대단했다. 83세의 나이에도 상상력과 꿈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어 고향을 찾는 그에게 축복이 함께하길 바랐다. 그가 옥수수 5만 톤,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넘는 장면은 한 편의 동화를 보는 듯했다. 그는 동화 속의 큰 목동 같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비화도 재미있다.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7·4 남북공동성명의 예를 들면서 임동원(당시 대통령 특보)과 김용순(당시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 명의로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자고 했지만 DJ가 “김 위원장, 일 처리 좀 시원하게 합시다”라고 설득해 두 정상 명의로 선언문이 작성됐다는 것이다.
당시 김 위원장은 “대통령이 전라도 태생이라 그런지 무척 집요하군요”라고 농을 던졌고, 이에 DJ는 “김 위원장도 전라도 전주 김씨 아니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아예 개선장군 칭호를 듣고 싶은 모양입니다’라고 하자 ‘개선장군 좀 시켜 주시면 어떻습니까.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덕 좀 봅시다’라고 응대했다고. 그러자 비로소 김 위원장이 웃었고, 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종료됐다고 술회했다.
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한 후 벌어진 에피소드도 흥미롭다. DJ는 자축하는 의미로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들어올렸는데 장내에 카메라 기자가 없어 역사적인 장면이 촬영되지 못한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김 위원장에게 말했다. ‘아까 우리가 나가서 한 것을 카메라기자들이 없어서 못 찍었다는데….’ 그러자 김 위원장이 즉각 받아 말했다. ‘그럼 오늘 배우 하십시다. 좋은 날인데 배우 한 번 하십시다.’ 나와 김 위원장은 다시 연단으로 나가 잡은 손을 높이 들었다. 세계가 주목한 역사적인 사진은 이렇게 연출된 것이었다.”
2002년 아들들의 비리와 관련한 ‘아버지의 변호’도 실려 있다. “당시 정권교체를 확신했던 검찰은 ‘지는 권력’을 향해 비수를 겨눴다. 그 표적이 홍업이었다. 홍업이의 주변인사 580명을 조사했는데 그중 오랜 친구를 지목해 홍업이의 비리 연루 혐의를 캤다. 회사를 압수수색하고 사생활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견디지 못한 친구는 검찰의 요구대로 혐의를 인정했고 출소 후 아들에게 사죄했다.”
DJ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목숨을 잃는 칼날 위에 섰고, 때로는 부귀영화의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매번 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는 소회를 밝혔다. 자서전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사의 심판이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DJ가 본 역대 대통령들
박정희 일가와 ‘질긴 인연’
DJ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으로 지역대립 조장을 들었다. “박 대통령은 전라도에 대해 문화적, 지역개발, 인재등용에서 차별했는데 이는 집요하고도 계획적으로 진행됐다. 드라마나 영화, 노래 속의 도둑이나 사기꾼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썼는데 경상도 청년은 씩씩하고 남자답게 묘사됐다.” DJ는 또 “박정희는 일생동안 일본에 호의를 갖고 살았는데 거의 충성심에 가까웠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일화도 있다. 2004년 8월 12일 김대중도서관을 찾아온 박 전 대표는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 드립니다”라고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DJ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는 소회를 밝혔다.
영원한 라이벌 YS
1990년 3당 합당과 관련해 DJ는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야합의 주역이 김 씨였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보다 집권욕이 앞섰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김 씨는 야당 정치인으로 소중한 덕목인 지조와 소신을 버렸다. ‘민주투사 김영삼’은 이렇게 사라졌다. 문민정부는 용을 그리려다 뱀을 그렸고, 그 자신도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로 변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DJ는 또 1992년 대선 당시 YS가 색깔론으로 비열한 유세를 펼쳤다며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기도 했다. “YS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후보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공격했다. 30년 민주화 동지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통령이 되려는 그의 욕망이 측은해보였다. 보다 못한 당 선거대책본부에서 ‘맞불작전’으로 YS의 자질과 여자문제를 거론하자는 특단의 조치를 냈으나 내가 강력하게 말렸다.”
노무현과 이명박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DJ는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관련해 “과거 건설회사 재직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정부 조직 개편안을 봐도 토건업식의 밀어붙이기 기운이 농후했다”고 우려를 표했다. 특히 북한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는 “대통령 후보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햇볕정책’에 공감한다고 말해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았는데 ‘선 핵폐기 후 협력’이라는, 미국 부시 대통령조차 폐기한 정책을 들고 나왔다”고 적었다. 또 “앞선 두 정부에서 이룩한 10년의 공든 탑이 무너지려는가. 이 대통령은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에 대해서는 현 정권에 책임을 돌렸다. “검찰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노 대통령의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을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조사했다. 매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수사기밀을 발표하며 언론 플레이를 했다. 노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분개했다.
또 검찰 수사와 관련해서는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라며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권력에 굴종하다가 약해지면 물어뜯는다”고 힐난했다.
▲ 2004년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한 박근혜 대표. |
DJ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으로 지역대립 조장을 들었다. “박 대통령은 전라도에 대해 문화적, 지역개발, 인재등용에서 차별했는데 이는 집요하고도 계획적으로 진행됐다. 드라마나 영화, 노래 속의 도둑이나 사기꾼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썼는데 경상도 청년은 씩씩하고 남자답게 묘사됐다.” DJ는 또 “박정희는 일생동안 일본에 호의를 갖고 살았는데 거의 충성심에 가까웠다”고 비판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일화도 있다. 2004년 8월 12일 김대중도서관을 찾아온 박 전 대표는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 드립니다”라고 정중하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DJ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했다.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는 소회를 밝혔다.
영원한 라이벌 YS
1990년 3당 합당과 관련해 DJ는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야합의 주역이 김 씨였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보다 집권욕이 앞섰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김 씨는 야당 정치인으로 소중한 덕목인 지조와 소신을 버렸다. ‘민주투사 김영삼’은 이렇게 사라졌다. 문민정부는 용을 그리려다 뱀을 그렸고, 그 자신도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로 변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DJ는 또 1992년 대선 당시 YS가 색깔론으로 비열한 유세를 펼쳤다며 불편한 심기를 토로하기도 했다. “YS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후보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공격했다. 30년 민주화 동지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대통령이 되려는 그의 욕망이 측은해보였다. 보다 못한 당 선거대책본부에서 ‘맞불작전’으로 YS의 자질과 여자문제를 거론하자는 특단의 조치를 냈으나 내가 강력하게 말렸다.”
노무현과 이명박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DJ는 이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관련해 “과거 건설회사 재직 때의 안하무인식 태도를 드러냈다. 정부 조직 개편안을 봐도 토건업식의 밀어붙이기 기운이 농후했다”고 우려를 표했다. 특히 북한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는 “대통령 후보로 나를 찾아왔을 때는 ‘햇볕정책’에 공감한다고 말해 실용적인 사람으로 알았는데 ‘선 핵폐기 후 협력’이라는, 미국 부시 대통령조차 폐기한 정책을 들고 나왔다”고 적었다. 또 “앞선 두 정부에서 이룩한 10년의 공든 탑이 무너지려는가. 이 대통령은 남북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자살에 대해서는 현 정권에 책임을 돌렸다. “검찰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노 대통령의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을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조사했다. 매일 법을 어기면서까지 수사기밀을 발표하며 언론 플레이를 했다. 노 대통령의 자살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분개했다.
또 검찰 수사와 관련해서는 “이 나라의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라며 “너무도 보복적이고 정치적이며, 권력에 굴종하다가 약해지면 물어뜯는다”고 힐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