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같았던 그녀가 노인들 등골 빼먹어
▲ 지난 4일 부산 강서구 가덕도에 위치한 우체국 앞으로 마을 노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 우체국장이었던 심 아무개 씨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가짜 통장을 만드는 등의 수법으로 사기 행각을 벌였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피해자는 대부분 세상물정이 어두운 노인들로 이들은 높은 이자를 챙겨주겠다는 심 씨의 말에 속아 쉽게 현금을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무려 5년간 심 씨에게 속아 왔으나 지난 5월 17일 수상한 낌새를 차린 한 주민의 고소로 내막을 알게 됐다고 한다. 경찰에 따르면 8월 5일 현재까지 고소장을 제출한 사람은 모두 13명, 피해액은 5억 1160만 원.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자체 파악한 결과에 따르면 심 씨는 20억 원이 넘는 금액을 가로챈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섬마을 현장을 찾아 황당한 사기사건의 자세한 정황을 취재했다.
인구 3000명 남짓한 부산 강서구의 작은 섬마을. 은행 하나 들어서 있지 않은 이 마을에서 별정우체국(우체국)은 섬 노인들이 외부와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지난 30여 년간 이 우체국을 운영해 온 김 아무개 씨는 일손이 바쁜 주민들의 손발이 돼주었다. 마을을 돌며 주민들이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를 거둬가 대신 부쳐주거나 돈을 저축하는 일도 대신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김 씨가 우체국장에서 물러난 후로는 그의 며느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이 우체국은 마을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애물단지’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김 아무개 할머니(81)는 심 씨가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에 한숨만 내쉬고 있다. 김 할머니는 그동안 어렵게 2000만 원가량을 저축해뒀던 터였다. 바다에 나가 부지런히 미역을 따도 하루벌이가 2만 원이 채 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활비를 아껴 조금씩 쌈짓돈을 모아왔다. 악착같이 돈을 모은 것은 그 돈으로 집 나간 며느리가 남겨두고 간 손자 두 명의 양육비와 교육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심 씨는 할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잘 따르곤 했다. 가족 같은 심 씨였기에 돈이 오고가는 것 역시 어색하지 않았다. 심 씨가 우체국장이 되고나서 “통장에 돈을 넣어두면 매월 18만 원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며 우체국 예금을 권했을 때도 할머니는 별 의심 없이 목돈을 맡겼다.
그러던 중 5월 17일 한 주민의 고소에 의해 심 씨가 구속됐다는 소문이 마을로 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떤 억울한 연유가 있겠거니 했지만 곧이어 심 씨가 채무관계 때문에 시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우체국을 팔려고 내놨다는 사실까지 드러나자 할머니는 문득 예금하라고 심 씨에게 맡긴 돈이 걱정이 됐다. 심 씨가 건네 준 예금통장을 들고 우체국을 찾은 후에야 할머니는 통장이 가짜통장임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자신 외에도 여러 사람이 당했음을 알았다. 모든 것이 계획적인 범행임을 직감하게 됐다. 김 할머니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도 모르는데 다시 그 돈을 어떻게 모으겠냐”며 “당장 학비 댈 돈은커녕 먹고 살 일이 걱정이다”고 손자들을 바라보며 가슴을 쳤다.
▲ 피해자 허 아무개 씨가 가짜 통장을 보여주고 있다. |
심 씨는 최 할머니의 돈까지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합의금을 준비했다는 할머니에게 심 씨는 합의를 해주지 않을 땐 재판까지 가야 하지 않겠냐며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예금통장에 돈을 넣어 준비자금을 넉넉히 모으라고 권유했다. 물론 이 역시 돈을 가로채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심 씨의 사기행각은 20년 지기 친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 씨와 같은 시기에 결혼해 섬마을 사람이 된 박 아무개 씨(48)는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그 속에 뭐가 있는지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남편 때문에 심 씨가 속을 끓일 땐 언제고 우체국장이 된 후 육지로 이사를 가더니 수백만 원짜리 명품가구로 집을 채워두고 자랑하더라”며 “그때 돈의 출처를 의심해야 했다”고 원통해 했다.
피의자 심 씨가 가족 같던 마을주민들의 신의를 저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사태를 지켜봐 온 이 마을 통장은 “심 씨가 처음에는 돈을 맡긴 마을주민들에게 이자를 꼬박꼬박 챙겨줬다. 실제 심 씨에게 받은 이자로 돈을 불려 집을 산 주민 A 씨도 있다”며 모두가 피해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A 씨에 대한 소문이 마을에 삽시간에 퍼져 너도나도 찾아가 심 씨에게 목돈을 맡기기 시작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라는 주장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심 씨는 약속을 꼬박꼬박 지켰고 그에게 돈을 맡기면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이웃 마을에까지 파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심 씨의 남편이 마을 주민들에게서 받은 원금을 사업비로 탕진했고 심 씨는 이 금액을 급히 막기 위해 대출을 받았다고 한다.
심 씨를 수사한 부산 강서구 경찰서 관계자 역시 8월 5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금액 대부분이 대출금 돌려막기에 쓰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심 씨는 교도소에 수감된 후 마을 주민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 ‘내가 왜 혼자 잘 살자고 돈 욕심을 부렸겠나. 교도소에 있으니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어 답답할 뿐이다. 얼른 나가 어떻게든 주민들의 돈을 갚을 생각을 하고 있다. 민사소송은 시간도 많이 걸리는 데다 형이 내려지면 돈 갚을 일이 더 멀어질 뿐인데 답답하다’고 고소를 취하해달라고 했다.
심 씨의 말처럼 실제로 피해 주민들은 돈을 돌려받을 방법이 없는 상태다. 우체국 측에선 심 씨의 단독 범행인 데다 우체국 예금을 통한 사기행각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마을에선 심 씨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자는 쪽과 반대하는 입장이 맞서고 있다. 실명을 밝히길 꺼려한 한 주민은 “심 씨가 고소를 취하하면 교도소에서 풀려나 가장 먼저 돈을 갚겠다고 했다”며 “변호사 선임비도 없는 상황에서 재판까지 가면 뭐하나. 심 씨가 나와 양심껏 돈을 갚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며 기사화를 만류했다.
현재 심 씨는 특정범죄경제가중처벌에 관한 혐의로 검찰에 송치돼있고,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살던 집을 비우고 이사한 후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