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촉발된 ‘미투 사건’이 마지막 꼬리표…국내외 영화계 “추모 삼가야”
지난 11일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숨진 영화감독 김기덕에 대한 추모를 놓고 국내 영화계는 “조심스럽다”는 입장을 내놨다. 사진=연합뉴스
김기덕 감독이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합병증으로 숨진 것은 지난 11일의 일이다. 현지 소식통 델피에 따르면 김기덕 감독은 11월 20일경 라트비아에 거주 목적으로 입국했다. 주택 구입과 영주권 문제 등을 논의하기로 했던 김기덕 감독이 며칠 간 연락이 닿지 않아 현지 동료들이 동분서주한 결과, 그가 이달 초부터 코로나19 증상을 보여 발트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입원 직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결국 김기덕 감독은 입원 이틀 만인 11일 오후 숨졌다.
코로나19로 전세계가 혼란스러운 상황을 고려, 김기덕 감독의 유족들은 라트비아를 방문할 수 없어 장례를 모두 현지에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덕 감독의 시신은 현지 대사관에서 화장한 후 국내로 송환될 예정이다.
족적만으로 놓고 본다면 김기덕 감독의 삶은 대한민국 영화사에서 반드시 언급될 수밖에 없다. 1996년 ‘악어’로 데뷔한 김기덕 감독은 칸, 베네치아, 베를린의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서 모두 본상을 받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유일한 영화감독이다.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 같은 해 ‘빈 집’으로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은사자상, 2011년 ‘아리랑’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상, 2012년 ‘피에타’로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그에게는 ‘국내가 아닌 해외가 선택한 감독’이라는 꼬리표가 종종 따라 붙었다. 국내에서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문제작’으로 불리곤 했다.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의 내면을 선연하게 드러내는 자기만의 세계관이 뚜렷한 감독이었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그의 작품은 ‘너무 마초적’이거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충격적인 작품으로 분류됐다.
해외가 사랑한 감독인만큼 이번 그의 죽음을 외신도 앞다퉈 보도했다. 그러나 ‘거장의 죽음’에 대해 무조건적인 추모의 의미로만 접근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자제하는 분위기다. 외신과 해외 영화계 역시 김기덕 감독의 가장 최근 소식이었던 2017년 연극영화계 미투 사건을 인지하고 있는 탓이다.
김기덕 감독은 2017년 연극영화계 미투의 가해자로 지목됐으며 이듬해 이 폭로 내용을 보도한 MBC ‘PD수첩’과 폭로 여배우 등을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사진=박정훈 기자
영화 ‘기생충’의 영어 자막 번역가인 달시 파켓은 지난 12일 트위터에 “지난 2018년 한국 TV에서 김기덕의 미투와 관련한 프로그램이 방송되면서 수업 때 김기덕 영화를 가르치는 것을 중단했다”며 “만약 누군가 실생활에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끔찍한 폭력을 가했다면 그를 기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영국 출신의 영화평론가 피어스 콘란도 트위터에 “김기덕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인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며 “그가 촬영장에서 저지른 끔찍한 행동에 대한 언급 없이 위대한 예술가가 죽은 것에 대해 (대부분 서양에서) 애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슬펐다. 영화계에 대한 그의 공헌은 결코 잊혀져선 안 되지만, 그의 괴물 같은 성폭력의 희생자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일침했다.
김기덕 감독은 2017년 자신의 영화 ‘뫼비우스’에 캐스팅됐던 여배우 A 씨로부터 미투 가해자로 지목됐다. 당시 A 씨는 김기덕 감독으로부터 연기 지도라는 명목으로 뺨을 맞거나 사전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베드신을 강요당했다고 폭로했다.
2018년에는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김기덕 감독에 대한 추가 폭로가 터져나왔다. 감독 지위를 이용해 여배우와 스태프를 성희롱, 추행하거나 성폭행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이 폭로를 보도한 MBC ‘PD수첩’과 A 씨에 대해 김기덕 감독 측이 명예훼손과 무고 등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PD수첩’과 A 씨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서 지난해 3월 김기덕 측은 다시 10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김기덕 측이 1심에서 패소했으나 지난 11월 항소를 제기하면서 ‘끝까지 갈 것’으로 점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인 김기덕이 사망함에 따라 소송 역시 취하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지막까지 그의 이름 뒤에 따라 붙은 것이 이 같은 추문이었던 탓에 국내 영화계에서도 추모를 놓고 조심스러운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아직 (영화계가) 공식적으로 추모글을 올리거나 관계자들이 개인적으로라도 관련 입장을 밝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심스럽다”라며 “공과 과를 구분해서 기억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김기덕 감독의 과는 영화계 내부에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섣부른 추모로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아픔을 줄 수 있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정보도문] 영화감독 김기덕 미투 사건 관련 보도를 바로 잡습니다. 해당 정정보도는 영화 ‘뫼비우스’에서 하차한 여배우 A씨 측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 본지는 2017년 8월 3일 <폭행 혐의 피소 김기덕 감독, ‘뫼비우스’도대체 무슨 영화길래>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한 것을 비롯하여, 약 9회에 걸쳐 영화 ‘뫼비우스에 출연하였으나 중도에 하차한 여배우가 김기덕 감독으로부터 베드신 촬영을 강요당하였다는 내용으로 김기덕을 형사 고소하였다고 보도하고, 위 여배우가 김기덕으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는 취지로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 결과, 뫼비우스 영화에 출연하였다가 중도에 하차한 여배 우는 ‘김기덕이 시나리오와 관계없이 배우 조재현의 신체 일부를 잡도록 강요하고 뺨을 3회 때렸다는 등’의 이유로 김기덕을 형사 고소하였을 뿐, 베드신 촬영을 강요하였다는 이유로 고소한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 여배우는 김기덕으로부터 성폭행 피해를 입은 사실이 전혀 없으며 김기덕으로부터 성폭행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한 피해자는 제3자이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 |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