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그룹 새 수장들 활발한 소통·사업적 협력…낙하산 임원보다는 바닥 다지며 경영수업 덕 분석
오른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현대차그룹은 지난 10월 20년 만에 총수를 교체했다. 정몽구 전 회장의 장남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이 그룹 회장에 올랐다. 정 전 회장은 올해 82세로, 대장게실염으로 입원한 후 건강은 회복했으나 세대교체와 그룹 혁신 차원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같은 달 25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별세했다. 2014년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은 뒤 6년간 병상에 있던 이 회장은 올해 병세가 악화되며 세상을 떠났다. 이건희 회장이 병석에 있는 동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그의 빈자리를 채웠고, 2018년엔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집단 동일인으로 지정되면서 삼성의 총수가 전환됐지만, 아직까지 회장 직함은 달지 않고 있었다. 재계에선 이 회장의 별세로 조만간 이 부회장이 회장 자리에 오르면서 3세 경영이 공식화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LG그룹은 일찌감치 4세 경영의 개막을 알렸다. 2018년 LG그룹의 3대 회장인 구본무 회장이 별세하면서 장남 구광모 회장이 그룹 총수에 올랐다. 올해 들어 그룹에 구광모 회장의 색깔이 완전히 입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1998년 회장에 올랐다. 2세대 경영인으로 분류되지만, SK그룹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과 부친인 최종현 회장에 이은 3대 회장으로 20년간 그룹을 이끌고 있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장남 최인근 씨가 에너지 계열사인 SK E&S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올해 삼성과 현대차그룹의 변화로 4대그룹은 1960~1970년대 생의 ‘젊은 총수’ 진용이 갖춰졌다. 교체된 새 총수들은 그룹의 변화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선대가 일군 사업이라도 비핵심 사업으로 분류되면 과감히 정리하고 신사업을 추진하는가 하면, 인사와 외부 인재 영입 등을 통해 새로운 경영 기반을 닦고 있다.
각 그룹 간 교류도 활발해지고 있다. 선대 회장들이 기업을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서로 견제했지만 3·4세대 총수들은 활발한 교류와 소통을 하고 있다. 비공식 회동을 열어 4대그룹 총수가 여러 차례 한자리에 모이는 등 친분도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다. 재계 한 관계자는 “새 총수들은 체면과 명분보다는 실리에 무게를 두고 있다”며 “각자 유연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좋은 기회가 오면 어렵지 않게 서로 손을 내밀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실제 지난 5~7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삼성과 SK, LG의 배터리 사업장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사업 협력을 논의한 장면도 그동안 재계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다. 전기차 시장은 세계적으로 급성장 중이고, 현대차는 미래 모빌리티 사업 전반을 확대 중이다. 여기서 우수한 품질의 배터리는 필수인데, LG와 SK가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고 삼성이 추격하고 있다. 4대그룹이 경쟁 대신 협력을 통한 ‘파이 늘리기’에 나선 셈이다. 전기차와 배터리 업계에선 오는 2021년 총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구상한 협력 방안들이 구체화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4대그룹 총수들 간 교류는 각 계열사와 다른 기업들과의 사업 협력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LG전자는 로봇 사업 확대를 위해 CEO(최고경영자)직속기구로 ‘로봇사업센터’를 신설했는데, 네이버 연구개발 자회사인 네이버랩스와 협력하고 있다. SK텔레콤은 카카오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3000억 원 규모의 지분 맞교환을 단행했다. 두 회사는 과거 카카오톡 출시 당시 SK텔레콤이 문자 메시지 매출 급감으로 타격을 입어 ‘앙숙’ 관계로 통했으나 이번 지분 맞교환을 통해 ‘혈맹’을 맺었다. 업계에선 두 회사가 단순히 한두 가지 사업 교류에 그치지 않고 콘텐츠 제작과 유통, 판매 전반에서 협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기업들에서도 세대교체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재계 서열 5위 롯데그룹의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은 지난 1월 별세했다.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의 난’을 거쳐 창업 2세대이자 둘째 아들인 신동빈 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았다. 동시에 신동빈 회장은 아들 신유열 씨를 일본 롯데에서 경영수업을 받게 하는 등 3세 경영에도 대비하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진=최준필 기자
신세계그룹은 이명희 회장이 이마트와 신세계 지분 일부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 사장에게 증여했다. 정용진 부회장에겐 이마트 지분 8.22%를, 정유경 사장에겐 신세계 지분 8.22%를 각각 증여하면서 이들 남매가 각각 두 회사의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정 부회장과 정 사장은 책임경영 체제를 강화하고 향후 계열분리 작업을 본격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3·4세들을 경영 전면에 배치하는 곳도 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전략부문장·부사장을 올해 인사를 통해 사장·대표이사로 선임했다. 2010년 한화에 입사한 김동관 대표는 올해 초에 부사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9개월여 만에 사장으로 승진했다.
GS그룹에서도 1980년대 생인 허주홍 GS칼텍스 상무보와 허치홍 GS리테일 상무보가 상무로 나란히 승진했다. 허주홍 상무는 허명수 전 GS건설 부회장의 아들이다. 상무보 직함을 받은 지 1년 만이다. 허진수 GS칼텍스 이사회 의장의 장남인 허치홍 상무는 2009년 GS글로벌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사촌·형제간 경영으로 잘 알려져 있는 GS는 지난해 말 허태수 회장이 허창수 명예회장을 뒤를 이어 3세대 사이 수평 이동됐다.
LS그룹은 올해 인사를 통해 오너가 3세들이 계열사 수뇌부로 자리를 옮겼다. 구동휘 LS그룹 전무가 액화석유가스(LPG) 계열사인 E1으로 이동해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올랐다. 구 전무는 구자열 LS그룹 회장의 아들로 1980년대 생이다. 고 구자명 LS니꼬동제련 회장의 장남인 구본혁 LS니꼬동제련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예스코홀딩스 대표 자리에 올랐다. 구자엽 LS전선 회장의 장남인 구본규 부사장도 LS엠트론 대표로 선임됐다.
2018년 말 이웅열 전 회장이 은퇴를 선언한 코오롱그룹도 올해 인사로 4세 경영의 막을 올렸다. 이 전 회장의 장남인 이규호 코오롱인더스트리 전무가 2년 만에 코오롱글로벌 부사장으로 선임됐다.
이번에 승진한 오너가 3·4세 대부분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 회사에 입사했다. 낙하산 임원부터 시작한 일부 선대 세대와 달리 실무직으로 입사해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밟아온 셈이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3·4세들이 많이 어렸다는 점도 있지만 일부는 스스로 국내 계열사나 해외 법인 등에서 경영 수업을 받겠다고 하기도 했다”며 “2020년을 기점으로 다수의 기업에서 젊은 오너일가 경영인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만큼 향후 재계 경영 분위기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