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바이오기업과 신약 개발 ‘파이낸셜 스토리’ 본격화…대한상의 회장 수락 여부도 주목
SK그룹의 투자형 지주회사 SK(주)는 최근 미국 바이오기업과 함께 신약 개발에 나섰다. 미국 로이반트(Roivant Science)에 2억 달러(약 2200억 원)를 투자해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고 ‘표적 단백질 분해’ 플랫폼을 활용한 신약을 개발하기로 했다. 로이반트는 2014년 설립된 회사로, 최소 10년 이상 걸리는 신약개발 과정에 인공지능과 데이터 전환 기술 등을 활용한 플랫폼을 적용해 신약 개발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인 기업으로 평가 받는다. 표적 단백질 분해 신약은 아직 시장 지배기업이 없어 글로벌 제약사들이 경쟁적으로 연구개발에 뛰어들고 있는 분야다. 기존 신약들은 질병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의 기능을 억제하는 방식이지만 분해 치료제는 원천적으로 그 단백질을 녹인다. 다양한 치료제 개발이 가능하고 효과도 월등해 제약업계에선 ‘꿈의 기술’로 불린다.
SK(주)는 로이반트가 자회사로 설립 예정인 표적 단백질 분해 연구 전문 자회사의 2대 주주로 경영에 공동으로 참여한다. 한국 기업이 미국 표적 단백질 분해 치료제 시장에 진출하는 것은 SK(주)가 최초다. 다만 지분율은 공개하지 않았다. SK(주)는 이번 투자로 기존 SK바이오팜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합성 신약 개발에서 바이오 신약 개발로 연구영역을 확대하게 됐다. 동시에 합성의약품 위주로 진행되던 CMO(위탁생산) 사업 또한 바이오 의약품으로 넓히게 된다. 합성 신약 시장이 성숙되면서 드러난 한계를 바이오 신약 시장 진출로 극복한다는 복안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공동취재단
투자 결정에는 최태원 회장의 뜻이 강하게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약 개발을 위한 투자는 경영진의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로 꼽히기 때문이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신약 개발에는 시간과 비용, 연구 전문성 등 까다로운 조건들이 필수로 따라붙고, 무엇보다 실패 가능성이 높다”며 “이 분야에 대한 핵심 경영진의 관심과 과감한 결정 끝에 나온 결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2007년 지주사 체제 전환 후에도 신약개발 조직을 지주사 직속으로 두고 투자와 연구를 지원해 왔다. 최 회장의 장녀 최윤정 씨도 SK바이오팜에 근무 중이고, 지난 7월엔 상장 기념식에 깜짝 등장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앞서 최 회장은 지난 10월 말 열린 ‘SK그룹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 ‘파이낸셜 스토리(Financial Story)’를 새로운 경영 화두를 제시했다. 고객, 투자자, 시장 등 파이낸셜 소사이어티(Financial Society)를 대상으로 SK 각 계열사의 성장 정략과 미래 비전을 스토리로 제시해 총체적 가치(Total Value)를 높여 나가자는 경영 전략이다. 이번 지주사의 신약 투자는 그룹이 추진하는 파이낸셜 스토리를 실현하는 대표적인 투자가 될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SK그룹 계열사들은 최 회장의 주문에 따라 오는 2021년을 파이낸셜 스토리의 원년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그동안 SK그룹 곳간에 쌓인 현금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에 시장의 관심이 쏠렸었는데, 시장 신뢰와 사회 공감 등 추구하고 있는 스토리와 맞는 기업에 투자금이 들어갈 것으로 관측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등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SK그룹의 연결기준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11조 8761억 원으로 지난해 말 7조 9818억 원과 비교해 약 50% 늘었다. 이에 대해 SK 관계자는 “앞으로 파이낸셜 스토리는 물론 ESG(Environment·Social·Governance, 환경·사회·지배구조를 뜻하며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 등 각 계열사 경영환경에 맞는 여러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면서 결국에는 총체적인 기업가치를 제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전경. 사진=일요신문DB
재계가 주목하는 최태원 회장의 또 다른 ‘결단’은 대한상공회의소 차기 회장 자리다. 대한상의 차기 회장 자리를 두고 다양한 재계 관계자들이 하마평에 오른 가운데 최 회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오는 2021년 3월 임기가 끝나는 박용만 현 대한상의 회장이 직접 최 회장에게 차기 회장직을 권유했고, 재계에서도 큰 이견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동안 최태원 회장이 4대그룹(삼성, 현대차, LG, SK) 총수 가운데 맏형 역할을 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대한상의는 이번 정부 들어 입지가 줄어든 전경련 대신 재계를 대표하는 곳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차기 회장이 되면 사실상 각종 정부 행사와 대외적인 자리에서 재계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맡게 된다. 대한상의 회장 선임 절차는 오는 1월부터 시작될 전망이다. 최 회장은 회장직 수락 여부에 대해 별다른 의견은 내지 않고 장고를 거듭해왔다.
그런데 최근 재계에선 연말 정기 인사를 통해 최 회장이 결단을 내렸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룹 내 2인자로 꼽히는 조대식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그룹 사상 처음으로 3연임을 했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는 그룹 내부 컨트롤타워이자 최고 협의체다. 각 계열사를 모아 경영전략을 도출하고 그룹의 진로를 결정한다. 조 의장은 최 회장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기에 한 명뿐이던 전문경영인 부회장을 2명으로 늘렸고, 주요 계열사 CEO들도 전원 유임됐다. 재계에선 최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이 되면 대외활동이 늘어날 것을 대비해 조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반면 SK그룹은 이번 인사는 최 회장의 대한상의 회장직 수락 여부와 관계없이, 그간 추진해온 ESG 경영 강화의 일환으로 단행됐다고 강조한다. 실제 인사와 함께 개편된 조직 구조도 ESG 경영에 초점이 맞춰졌다. 수펙스추구협의회에 거버넌스위원회를 신설하고 이사회 중심 경영을 더욱 강화하기로 했다. ESG 중 지배구조(G) 관련 작업이다. 기존의 에너지·화학위원회를 없애고 환경사업위원회를 신설한 것은 환경(E) 관련 경영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회사 관계자의 설명이다.
앞서의 SK 관계자는 “대한상의 회장 수락 여부에 대해선 알 수 없다”며 “이번 인사와 조직개편은 그동안 준비해 온 경영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