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라인’ 틀어쥐고 단독드리블
▲ 최근 이재오 특임장관의 90도 인사가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자신을 낮추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정가에선 그 뒤에 숨은 정치적 의도가 무엇인지 주목하는 분위기다.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최근 관가는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8층에 있는 특임장관실을 눈여겨보고 있다. 이재오라는 막강한 2인자가 들어오면서 특임장관의 역할이 과연 어디까지 확대될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관가의 한 고위 공무원은 이에 대해 “현재 특임장관실 정원이 41명인데 100여 명까지 늘릴 것이라는 얘기가 공무원 사회에 돌고 있다. 이는 그가 여권의 실세임을 증명하려는 일종의 세 과시 성격이 짙다. 한편으론 이 장관이 그만큼 대통령의 특명을 수행할 일이 많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전임 장관 땐 인력들의 역량이 많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번에 조직이 확대 개편되면 인재들을 대거 충원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그만큼 이재오 장관의 힘이 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이미 이재오 장관의 광폭행보에 바짝 몸을 엎드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명박 정권의 후반기에 내각에 입성함으로써 그가 군기반장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 장관은 최근 열린 장·차관 워크숍에서 이례적인 발언 기회를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장관들이 몸을 던져 야당을 설득해야 한다. 장관들이 사전예방이라는 생각을 갖고 뛰어야 한다. 정치는 현장에 가면 답이 나온다. 기자도 현장에 가면 헤드라인이 바뀐다는 말을 들었다”라며 장·차관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정부부처의 보좌관은 이에 대해 “실세 장관이 들어오면서 분위기가 확 바뀐 것 같다. 장관들도 긴장하는 것을 많이 느낀다. 아무래도 대통령과 언제든 직접 연결되고, 쓴소리도 할 수 있는 국정의 실질적인 동반자라는 점에서 그의 언행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런 그의 정치적 위상은 일찍이 청문회 정국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김태호 전 총리 후보자를 비롯한 신재민 이재훈 두 장관 후보자의 낙마와 딸 특채에 연루된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전격 경질의 뒤에도 이 장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김 전 후보자의 경우 첫날만 해도 청와대의 기류는 ‘무조건 통과시켜라’는 쪽이었다. 신재민 전 후보자는 그가 워싱턴 특파원 시절부터 이 대통령과 친분이 깊었기 때문에 ‘보호 대상자’ 명단에 들어있었고, 선진국민연대 라인인 이재훈 전 후보자도 낙마할 가능성이 낮아보였다. 게다가 이 대통령은 한 번 낙점한 인사에 대해서는 웬만해선 바꾸지 않고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밀어붙이겠다는 게 청와대의 방침이었다. 그런 이 대통령의 고집을 꺾은 사람이 바로 이재오 장관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청문회 둘째 날부터 김 전 후보자에 대한 여권 내 기류가 급격하게 바뀌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재오계로 분류되는 여당 의원들의 질문 강도가 전날에 비해 상당히 날카롭고 강하게 돌아선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장관은 청문회 뒤 측근들에게 “청문회 기간에 지역구(서울 은평을) 약수터에 갔더니 주민들이 새벽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김태호 총리 자르라’ ‘장관 후보 비리가 너무 심하다’고 언성을 높이더라”는 등의 경험담을 몇 차례 털어놨다고 한다. 그는 이런 여론을 이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낱낱이 전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의 전격적인 경질도 이재오 작품이라는 말들이 많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낙마한 뒤 구사일생으로 7·28 재·보궐 선거 승리로 정치판에 복귀한 그의 첫 일성은 ‘민심’이었다. 여권의 2인자였지만 몇 년 동안 재야로 떠돌며 절치부심 재기를 노려온 그가 저잣거리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대로 대통령에게 전달하자 누구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유 전 장관 경질에도 어김없이 ‘이명박-이재오 핫라인’이 작동했기 때문에 전격적인 처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장관은 하루에도 수차례 이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면서 민심을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안다. 유 전 장관 사태도 초기에는 G20 개최 때문에 전격 경질은 힘들 것으로 보았는데 예상과 달리 빨리 처리돼 놀랐다. 이 장관이 움직이지 않았으면 힘든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이-이 라인’이 여권의 중대사를 모두 결정하는 시스템은 당·청 간의 대등한 관계를 무력화시키고 권력의 과대 집중을 야기할 수 있어 여권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친이계 내에서 이재오 장관의 ‘아래’로 분류되는 안상수 대표의 입지가 애매모호해지고 있다. 여당의 대표이긴 하지만 청문회 정국 등에서 그의 존재감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홍준표 최고위원 등의 견제도 있었지만, 이재오 장관의 단독 드리블에 그가 슈팅할 찬스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 대표도 이를 의식해서인지 지난 9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당청 조찬회동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다소 이례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는 으레 당·정·청 모임에서 오가는 의례적인 ‘멘트’를 생략한 채 따로 준비한 원고를 장황하게 읽어 대통령이 함께한 자리에서 미묘한 긴장감도 흘렀다는 후문이다. 당장 여당 내부에서는 “그동안 이 대통령이 이 장관만 과도하게 호흡을 맞추며 앞서나가자 안 대표가 드디어 공개석상에서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그가 스스로 강조해 온 ‘수평적 당·청관계’를 의식해 작심 발언을 한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그럼에도 안 대표나 비주류 홍준표 최고위원이 이재오 장관의 광폭행보에 대해 전혀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게 여권 내부의 평가다.
한나라당의 소장파 의원은 이에 대해 “이런 식의 일방적 독주는 분명히 저항을 부를 것이다. 안 대표가 물론 이재오 장관의 계보 아래에 있지만 집권 여당의 대표로서 당·정·청 관계를 볼 때 이 장관을 컨트롤해야 하는 윗사람이다. 그럼에도 이 장관이 국정 현안 전반에 사사건건 개입하게 되니 여당 대표의 역할은 없어지고 당·정·청 관계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조만간 이 장관의 무한 역할에 대한 당·정·청의 갈등이 시작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이 장관이 대통령과 핫라인을 가동해 중대사를 직접 결정한다는 이야기가 나돌면서 여당 의원들도 그의 눈치를 보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이 대통령과는 직접 접촉할 일이 없지만 이 장관과는 언제든 만나 현안에 대해 논의해야 하는데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줘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일종의 몸 사리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권의 권력 풍향에 본능적으로 밝은 여당 의원들이 그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비판을 삼가는 경향이 발생하고 있다. 더구나 그를 견제할 만한 세력인 소장파마저 민본21이 해체될 가능성이 대두되는 등 와해 직전에 있기 때문에, 이 장관은 더 거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정책 중심으로 내각만을 컨트롤하고, 이 장관이 정치전반을 관장하는 실질적인 여권의 투톱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라는 평가마저 나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도와 공동 집권에 성공한 이재오 특임장관은 이제 서서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올라서고 있다. 하지만 그의 행보에 제약이 많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관가의 한 고위 공직자는 “국민권익위원장 때는 독립된 기관이라 이 장관 소신껏 해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이명박 대통령의 아바타 아닌가. 국정에 광범위하게 관여하며 지나치게 앞서 나가고 싶겠지만 대통령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권익위원장 때보다 활동의 제약은 더 많을 것이다. 더구나 대권 도전을 연상케 하는 광폭행보를 계속할 경우 청와대 임태희 대통령실장과도 갈등을 빚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재오 장관 측은 이에 대해 “현장 방문 위주의 장관 소임을 다할 뿐 정치적 행보는 최대한 자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고도 2년 반 동안 재야를 떠돌다 마침내 권력의 최정점에 서게 됐다. 이 장관이 화려한 컴백을 하면서 제일 신경 쓴 일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이 아직도 그의 90도 인사의 뒤에 숨은 정치적 의도를 더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직 그가 완전히 민심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