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 커졌는데 ‘밥상’은 그대로
▲ 제14회 삼성화재배 4강 진출자들로 이번 대회 시드를 배정받아 자동 진출했다. 맨 오른쪽이 이창호 9단. |
본선전에서는 점심시간을 없앴다. 일리가 있다. 제한 시간 각자 2시간이므로 아침 9시나 10시에 시작하면 점심을 거르고 대국을 마칠 수 있다. 중간에 점심시간이 있으면 점심을 먹고 잠시 쉬면서 기분 전환도 할 수 있어 대국자에게는 물론 좋지만, 대신 대국 도중에 연구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니 그건 게임의 엄정성과는 좀 거리가 있다.
또같은 나라 선수들끼리 가볍게 의논도 할 수가 있다. 대놓고 함께 복기를 하거나 할 수는 없지만, 가볍게 말로 한두 마디 주고받을 수는 있는 것. 프로기사는 말로도 얼마든지 복기가 가능하다. “좌상귀 정석에서 조금 이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백이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거기서 끊으면 어떻게 되나…?” 이런 정도의 대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결정적 훈수가 될 수가 있는 것. 원래 대회 바둑을 두는 장소에서는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숨을 크게 들이쉬거나 기침을 하는 것도 다 훈수라는 것 아닌가.
삼성화재배는 아무튼 대회 운영 방식에서 앞서 가고 있다. 다른 기전들을 리드하고 있다. 상금제, 32강 컷오프제, 더블일리미네이션, 시니어-여성을 위한 별도의 시드, 아마추어 참여 허락, 점심시간 생략 등등은 과연 참신한 발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삼성화재배가 고려해야 할 점도 있다고 지적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우선 예산이다. 창설 후 15년이 지나는 동안 예산은 늘어난 것이 없다는 것. 15년 전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는 100명 선이었다. 지금은 247명, 객원기사를 빼도 244명이다. 식구가 두 배 반이 늘어났다. 게다가 중국 일본의 프로기사, 국내 아마추어들도 출전할 수 있게 되어 경쟁은 두 배 반이 아니라 서너 배 이상 치열해졌다. 15년 전, 1차예선 대국료가 70만 원이었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액수였다. 예선에서도 몇 판 이기면 200만~300만 원은 쥘 수 있었다. 그게 지금은 상금제로 바뀌었다. 본선에 올라가지 못하면 대국료 수입이랄 게 없게 되었다.
승부의 박진감, 프로의 진정한 프로다움을 위해 상금제로 바꾼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산은 늘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삼성이나 삼성화재가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위상은 새삼 말할 게 없다.
상금제 자체도 사실은 손을 좀 대야 할 부분이 있다. 나이 먹은 기사들만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소장파 기사들 사이에서도 이상하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올라가려면 5~6번을 이겨야 한다. 예컨대 5번을 이겨야 한다고 할 때, 첫 판에서 져 탈락하면 불만이나 이의가 없지만, 4번을 계속 이겨 올라가다가 다섯 번째 판에서 지는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대국료가 없으니, 본선에 올라가지 못하면 상금을 받을 수 없으니, 예선 첫 판에서 진 1패자나 네 번을 이기고 한 판을 진 4승1패자나 수입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조금 억울하다. 자비 출전이므로 다섯 번을 대국해 4승1패한 사람이 한 판을 두고 탈락한 사람보다 오히려 손해라는 얘기가 된다. 4승1패가 1패보다 못하다는 것, 이건 좀 이상하다. 구차한 얘기일까. 프로는 그 정도 아픔이나 모순은 늘 각오해야 한다는 것일까. 우승만 하면 몇 억대의 상금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또 하나. 이것도 거듭 지적되는 것이지만 국내 바둑계의 중국 편향이다. 중국 바둑계는 우리 바둑계보다 크다. 그런데도 중국은 변변한 세계대회 하나 없다. 심지어 우리가 잔칫상만 벌였다 하면 중국은 숟가락 하나만 들고 우르르 몰려온다는 냉소도 있다. 삼성화재배와 LG배 둘 중 하나는 국내 기전을 대폭 키우는 쪽으로 방향을 좀 바꾸면 안 되는 것인지.
우리 바둑은 일본을 이기면서 붐을 이루고 비약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시대다. 일본과 중국을 누르면서 15년쯤 세계 정상을 확실히 구가했으니 이젠 생각을 좀 달리할 때가 되었다. 북한 바둑도 이제는 우리 아마 정상 수준까지는 올라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둑이야말로 전혀 정치색이 없는 종목이므로, 중국 편향에 들어가는 돈으로 차라리 북한 바둑을 좀 키워주는 연구를 하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차라리 미국이나 유럽, 러시아 혹은 동남아로 가서 그들과 우리가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바둑대회는 여는 것은 어떨까. 바둑올림픽 같은 것이 구상되어 세계 바둑계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게 될 때를 가정한다면 그게 우리 편, 우리 표를 만드는 길 아닐까. 바둑올림픽 주도권 경쟁에서 중국이 우리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