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홀리’서 ‘타락 천사’로 곤두박질
린다 러블레이스는 1949년 뉴욕 브롱크스 지역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린다 보어먼. 아버지는 경찰이었고 어머니는 매우 엄격했다. 뿌리 깊은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린다는 미션 스쿨에 다녔는데 고등학교 시절 그녀의 별명은 ‘미스 홀리 홀리’(Miss Holy Holy)였다. 굳이 번역하면 ‘성스럽고 성스러운 여자’ 정도가 될 텐데, 항상 어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이성 친구를 사귀었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뉴욕에서 플로리다로 이주한 린다는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녀의 꿈은 소박했다. 옷 가게를 운영하는 것. 하지만 스무 살 때 풋사랑의 결과로 아이를 낳았고 그녀의 어머니는 곧장 입양을 보내버렸다. 다음 해 뉴욕으로 떠났지만 대형 교통사고를 겪었고 이때 무분별하게 받은 수혈로 간염에 걸려 평생 고생하게 된다(결국 1987년엔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린다는 척 트레이너라는 남자를 만난다. 부모와 살고 싶지 않았던 린다에게 그는 탈출구처럼 여겨졌고 1971년에 그와 결혼해 뉴욕으로 온다. 하지만 이 만남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트레이너는 남편이자 매니저였고 포주였다. 린다에게 섹스 테크닉을 가르친 트레이너는 싸구려 포르노에 린다를 출연시켰다(이 중엔 수간을 다룬 <독 퍼커 Dog Fucker>라는 포르노도 있었다). 그렇게 포르노 배우가 된 린다는 제라드 다미아노라는 남자를 만난다. 미용사였던 그는 여성들의 욕망에 민감했고 <목구멍 깊숙이>(1972)라는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다. 다미아노는 린다의 옆집 소녀 같은 수수한 용모에 끌렸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 클리토리스가 있는 여자로 등장하는 린다는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 오럴 섹스를 한다. 여기서 그녀는 아무리 긴 페니스라도 완전히 입안에 넣는 놀라운 테크닉을 보여주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LL(린다 러블레이스)라는 약자는 MM(마릴린 먼로)이나 BB(브리지트 바르도)만큼 유명해졌고 <플레이보이>는 물론 <에스콰이어> 표지를 장식하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유명세는 순간이었다. 1974년에 2편이 나왔고, 1975년엔 <린다 러블레이스를 대통령으로>라는 에로틱 코미디에 출연했지만 모두 흥행에서 대재앙을 맞이했다. 1974년엔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고 같은 해 두 권의 자서전이 나왔지만 그녀는 이름만 빌려주었을 뿐 출판사의 한탕주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1980년 그녀의 진짜 자서전인 <시련 Ordeal>이 나왔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논란이 되었다. 린다는 이 책에서 포르노를 찍을 때 트레이너가 자신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고, 트레이너는 5명의 남자를 동원해 자신을 윤간했다고, 매일처럼 폭력을 행사했다고, 그리고 <목구멍 깊숙이>의 출연료로 받은 1250달러마저 트레이너가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당대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과 연대를 맺었다. 미즈 위원회에 출석했을 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제 시련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화는 계속 상영되고 있고 관객 모두가 제가 강간당하는 걸 지켜보는 겁니다.”
이렇게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포르노 배우는 ‘안티 포르노’의 여전사가 됐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돌파구가 되지 못했다. 그녀의 삶은 여전히 불행했고 1974년에 만난 두 번째 남편은 고약한 음주벽을 지닌 남자로 툭하면 폭언을 일삼았다(결국 1996년에 이혼한다). 새 출발을 위해 덴버로 이주해 우편물 관리인으로 일했으나 과거가 드러나면서 해고당했다.
2002년 4월 교통사고를 당한 그녀는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3세. 이후 그녀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2008년엔 록 뮤지컬인 <러블레이스>가 만들어졌으며, 비록 무산되었지만 커트니 러브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기획되기도 했다. 지금은 린제이 로한을 주인공으로 기획 중이라는 소문. 거대한 욕망과 한없는 고통의 삶을 살았던 린다 러블레이스의 삶이 어떻게 재현될지 궁금하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