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중국설” “한복 아닌 한푸” K팝 커뮤니티 테러…침묵하는 엔터사도 ‘뭇매’
설 연휴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의 공식 팬 커뮤니티 앱 리슨에서 중국 팬들이 몰려와 ‘게시글 테러’를 저질렀다. 사진=리슨 캡처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설 연휴 직전인 2월 10일, 리슨 측이 연휴기간 동안 고객센터 운영을 중단한다는 영어 공지를 내며 ‘Korean New Year’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다. SM엔터테인먼트에도 공식 사과를 요구하던 이들은 며칠 뒤 같은 소속사 보이그룹 NCT의 대만 출신 멤버 양양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Happy Chinese New Year’(즐거운 중국 설 되세요)라는 글을 올리자 더욱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이며 한국 팬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SM엔터테인먼트는 중국과 한국 팬, 양쪽 모두에게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은 채 이슈를 넘겼다.
이 같은 중국 팬들의 ‘생트집’은 YG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 제니에게도 불거졌다. 이번에는 ‘콘셉트’가 문제였다. 제니의 무대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중국 드라마 ‘서유기’ 속 아동 캐릭터 ‘홍해아’의 모습을 그대로 베꼈다며 중국 팬들이 K팝 팬 커뮤니티와 멤버의 SNS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인 것이다. 역시 YG엔터테인먼트나 제니 본인이 모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넘어가면서 해프닝이 되고 말았지만 중국 팬들은 여전히 트위터 등을 통해 제니의 사례를 ‘한국 연예계의 중국 문화 베끼기’ 리스트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켜 다른 해외 K팝 팬들에게 유포하고 있다.
무대 의상으로 한복을 입었던 아이돌들도 중국 팬들의 타깃이 되고 있다. 2017년 네 번째 미니앨범 ‘도원경’을 발표하며 검은 두루마기와 허리끈에 단 노리개, 쥘 부채로 완성한 스타일로 해외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던 보이그룹 빅스는 이듬해 중국의 아이돌이나 패션쇼 행사 등에서 그대로 스타일링을 표절당했다. 그런데 최근 중국 팬들 사이에서는 이 역시 한국이 중국의 것을 베낀 것이라는 주장으로 편집돼 해외 K팝 사이트에 유포되고 있다. 비슷하게 한복 스타일로 무대를 꾸몄던 다수의 걸그룹도 “한복이 아니라 중국의 한푸(Hanfu) 의상”이라며 공식 SNS에 몰려온 중국 팬들의 테러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한복의 어레인지로 호평을 받았던 보이그룹 빅스의 ‘도원경’ 의상은 중국의 아이돌과 패션쇼 무대 등에서 표절되기도 했다. 사진=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대형 엔터사들이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이 같은 중국 팬들의 집단 ‘문화 침탈’ 행위에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앞서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투자사에도 중국 대기업의 지분이 커지며 한국 드라마에 중국 PPL이 나온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대형 엔터사들의 중국 자본 투자 비율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컨대 SM엔터테인먼트의 경우 2016년 중국의 대기업인 알리바바로부터 350억 원 상당의 투자를 받으며 2020년 10월 기준으로 알리바바가 약 3.7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YG엔터테인먼트도 상하이펑잉과 텐센트모빌리티가 각각 5.78%와 4.37%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빅히트엔터테인먼트의 경우 중국계 벤처캐피털인 레전드캐피털이 6.2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SM엔터테인먼트의 경우는 수장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tvN 인문 교양 프로그램 ‘월간 커넥트’에서 중국 시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우리가 직접 중국에 가서 (프로듀싱을) 전수해주고, 그곳의 인재들과 세계에서 1등을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프로듀싱의 시대’가 됐다”며 “중국은 우리를 받아들이고, 전 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여 자기들의 것으로 한층 새롭게 크로스오버해 전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아시아의 할리우드’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언급해 국내 팬들의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앞서 2007년과 2011년, 2016년, 2017년에도 꾸준히 비슷한 견해를 밝혀온 그의 의견이 현재 중국 팬들이 취하고 있는 문화 침탈 행위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이런 이슈를 놓고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로서는 뾰족한 해결 방안이나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고 난색을 표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엔터사 관계자는 “SM엔터의 경우 초창기부터 중국 시장을 겨냥해 왔기 때문에 중국 시장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다. 비록 중간에 탈주할지라도 꾸준히 중국 멤버를 그룹에 넣고 중국 활동을 위한 그룹을 만드는 것도 시장 타기팅이 확실하기 때문”이라며 “그런 입장을 몇십 년 고수해 온 상황에서 중국 시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 연예 사업은 ‘정부의 가치에 해가 될 요소는 원천 배제한다’는 것이 철칙이기 때문에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짚었다.
중국 네티즌들의 문화 침탈 행위에 대해 래퍼 이센스가 자신의 인스타스토리에 그들을 겨냥한 글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진=이센스 인스타스토리 캡처
다만 최근 중국 팬들 사이에서 불거지고 있는 문화 침탈 행위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슈가 됐던 ‘중국 눈치보기’와는 궤를 다르게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제까지 엔터사들 사이에서 중국의 눈치를 보고 꼬리를 내리거나 침묵을 지켰던 사례는 JYP엔터테인먼트 소속 걸그룹 트와이스 멤버 쯔위의 청천백일만지홍기(대만의 국기) 논란,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를 놓고 국내에서 활동 중인 중국인 아이돌 멤버들의 홍콩 경찰 및 중국 정부 공개 옹호 논란 등이 있었다. 이 같은 이슈들은 국제 관계가 얽혀 있어 국내 기업이 입장을 밝히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내 연예 산업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최근의 문화 침탈 이슈까지 제대로 방어하지 않는다면 산업 자체를 뺏길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크다.
또 다른 연예계 관계자는 “중국은 정부가 연예문화산업까지 손을 뻗고 있어서 우리나라와 합작 엔터사를 차리거나 투자를 받더라도 정부가 제재를 하면 바로 계약을 파기해 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사실상 가장 불안전한 시장”이라며 “한한령으로 내쳐 버린 한국 연예계가 각종 엔터 사업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하니 갑자기 ‘K엔터는 모두 중국의 것’이라며 수저만 올리려고 하고 있다. 그런 행위에 적극적인 반격까진 아니더라도 제대로 방어할 수 있도록 대응 정도는 해야 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