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대선도 턴다… 핵폭탄이냐 공포탄이냐
▲ 대검 중수부가 C&그룹을 시작으로 대기업 사정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사진은 김홍일 중수부장. |
대기업을 겨냥한 검찰의 거침없는 사정 드라이브는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 기조로 내세운 ‘공정사회’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김준규 검찰총장도 최근 국감장에 출석해 “중수부 수사체제가 시작됐다”고 언급해 대대적인 사정몰이를 예고한 바 있다. 김 총장은 또 현재 진행 중인 대기업 수사와 관련해서도 “비자금의 흐름을 보겠다”고 말해 검찰의 사정 칼끝이 정·관계를 겨냥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검찰발 ‘사정 리스트’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이 리스트에는 현 정권 실세를 비롯해 구 정권 거물급 인사, 여야를 망라한 현직 국회의원, 전·현직 고위공직자 등 수십 명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한화그룹 비자금 사건에는 5공 인사들이 포함된 리스트가 거론되고 있다. 검찰은 한화그룹의 차명계좌로 의심되는 56개의 계좌에 조성된 비자금 300억 원 중 일부가 여야 정치권에 유입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화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서부지검은 한화그룹 전·현직 임원 20여 명과 회계담당자 등 관련자들에 대한 소환 조사를 통해 비자금 용처에 대한 일부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검찰은 특히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한화그룹이 5공 인사들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던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한화그룹 임원이었던 K 씨는 지난 2007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라는 자서전을 통해 “한화증권의 전직 임원 L 씨가 5공 측 인사의 자금을 맡아 운영해 준 적이 있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L 씨는 지난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 당시 이 같은 혐의가 포착돼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기도 했다. 검찰은 한화그룹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 자서전을 입수했으며 한화그룹을 압수수색하기 위한 영장에도 이 같은 내용을 기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한화그룹의 비자금 조성 경위 및 용처를 철저히 파헤쳐 5공 인사들과의 연관성 여부도 수사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차명계좌를 통해 한화그룹의 비자금 조성 경위와 흐름이 지난 2003~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번 비자금 사건이 자칫 2007년 대선자금 수사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여야 대선후보 진영에 한화의 비자금이 유입된 정황이 드러날 경우 정치권은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태광그룹 로비 의혹 및 비자금 사건에는 전·현 정권 실세들과 고위공직자, 여야 현역 의원들 상당수가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100여 명에 달하는 정·관계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검찰도 태광그룹에 대한 전 방위적인 압수수색 등을 통해 태광 측이 관리해 온 정·관계 인사 100여 명의 명단을 확보하고 비자금 흐름 및 유입 과정을 세밀히 살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광 리스트’와 관련해 전·현 정권 실세는 물론 여야를 망라한 정치인들이 대거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만큼 정치권은 벌써부터 팽팽한 기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여권은 참여정부 인사들이 타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야권은 이른바 ‘밀양라인’(청와대·방송통신위원회 내 PK 출신 인사)이 태광 사건의 배후라고 맞서고 있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태광그룹 계열사인 ㈜티브로드홀딩스가 ㈜큐릭스홀딩스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밀양라인’의 개입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선공을 날렸다. 박 원내대표가 ‘밀양라인’을 배후로 거론한 배경에는 2008년 12월 한 사업자가 25개 권역까지 겸영할 수 있도록 방송법 시행령을 개정하는 과정에 청와대와 방통위의 경남 밀양시 출신 공직자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의혹이 자리잡고 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현 정권 핵심실세로 통하는 A 씨와 B 씨를 비롯해 한나라당 중진인 K J 의원, 고위당직자인 K J L 의원, 또 다른 K J 의원 등 10여 명이 ‘태광 리스트’로 거론되고 있다.
야권은 지난해 3월 태광그룹의 케이블방송사업 확대와 관련해 정·관계 로비 의혹을 부추겼던 청와대 행정관 2명과 방통위 직원의 ‘성접대’ 사건을 재점화시켜 태광그룹과 현 정권 인사들의 검은 커넥션을 정치쟁점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검찰도 청와대 행정관 성접대 사건에 대해 재수사 방침을 정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태광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는 참여정부 인사들이 타깃이 돼야 한다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검·경과 국세청 등 사정당국의 태광그룹에 대한 내사 및 수사는 참여정부 때인 2003년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돼 온 만큼 참여정부 실세 및 당시 고위공직자들이 태광 측의 로비대상이 됐을 것이란 논리다. 실제로 태광그룹은 2003년과 2006년 이호진 회장 일가의 횡령 및 배임,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 등으로 검찰 수사가 진행됐지만 약식기소로 종결된 바 있다. 2007년에는 국세청이 태광그룹을 상대로 특별세무조사를 실시했지만 이 회장은 검찰 고발을 피했다.
한나라당은 참여정부 때 사정당국의 집중적인 내사와 수사를 받아온 태광이 건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참여정부 실세와 고위공직자들을 상대로 한 태광 측의 전방위 로비가 통했기 때문이라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은 태광그룹 로비 의혹 사건의 ‘몸통’은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라며 아예 실명까지 거론하며 민주당을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한나라당과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참여정부 당시 실세로 통하며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L J 씨를 비롯해 L 전 의원, 민주당 중진인 J M 의원, 친노인사인 P 의원과 L 전 의원 등이 ‘태광 리스트’로 오르내리고 있다.
‘C&그룹 리스트’에는 호남권 정·관계 유력 인사가 상당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C&그룹은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한 기업으로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급성장했다는 점에서 구 정권 인사들과 유착 의혹이 가시지 않았다. 특히 전남 영광 출신으로 학창시절을 광주에서 보낸 임병석 회장은 호남권 일부 실세 정치인들의 정치후원자 역할을 자임하며 적잖은 정치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연차 게이트’ 사건 이후 1년 6개월여 만에 사정칼날을 빼든 대검 중수부가 호남기업인 C&그룹을 첫 타깃으로 정한 배경에 ‘구 정권 털기’라는 복심이 투영돼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찰이 C&그룹 비리 사건 수사를 명분으로 C&그룹과 유착관계에 있던 구 정권 인사들에 대한 사정작업을 본격화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로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동교동계를 비롯한 친노인사와 현 민주당 유력 인사에 이르기까지 구 정권 인사들이 ‘C&그룹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범동교동계로 분류되고 있는 민주당 중진 P 의원과 H 전 의원, 호남권 유력 정치인인 J 의원, 민주당 핵심 당직자인 L P 의원, 구 정권 당시 금융계 거물로 통했던 L 씨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당 핵심당직자인 P 의원의 경우 친동생이 과거 C&중공업 고문으로 재직한 사실에 미뤄 C&그룹의 정·관계 로비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연계돼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최근 기자와 만난 민주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개점휴업에 들어갔던 대검 중수부는 그동안 은밀히 박지원 원내대표 등 민주당 유력 정치인들에 대한 비리 의혹을 저인망식으로 조사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민주당 인사들의 비리 정황이 포착되지 않자 호남기업인 C&그룹 비리사건을 재부각시켜 노골적으로 ‘구 정권 죽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대검 중수부를 필두로 한 검찰의 거침없는 대기업 사정수사의 최종 종착지는 어디일까. 재계는 물론 여의도 정치권과 관가를 초긴장 모드로 몰아넣고 있는 검찰발 ‘사정 리스트’가 어떤 식으로 그 실체를 드러낼지 자못 궁금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