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아이에게 엄마는 절대자 아닌가. 아이는 엄마에게 억지로 설득되어 그 옷을 입었다. 그런데 멀리도 안 가고 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순간, 대구에서 올라와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의 외할머니가 이렇게 반응했다. 야, 우리 강희, 참 예쁘구나. 조카는 앙, 울었다. 왜 울었을까?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면 속에서는 두려움이 자란다. 억지로 강한 사람이 되고자 하면 스스로 경직되어야 한다. 겸손하게 보이려고 하면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 겸손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나이가 들었어도 자연스러움이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내가 내 자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내 속에 너무 많은 것이다. 나조차 보고 싶어 하지 않은 것들이….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찌 자기 생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자유는 자기 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생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유로울 수 없고, 자기 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한 지향성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선하지 않은지 알지 않으면 선함에 대한 강박증을 앓을 수는 있어도 선해질 수도 없고, 우리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지 않으면 순수해질 수도 없다.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는 어떤 문제에 예민해지는지, 어떨 때 앓아눕는지, ‘나’는 언제 화를 내는지, 내가 참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지, 찬찬히 자기를 응시하는 일이다.
분명히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이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실제로는 내가 날 가장 잘 모른다. 세상의 비밀을 풀어 인간 중의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되었으나 자기 자신의 비밀을 풀지 못해 파멸에 이르는 자, 그게 오이디푸스고, 그게 인간이 아닌가. 그런데 세상을 얻고도 나 자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자유가 당신의 화두인가? 자유롭기 위해서는 사르트르 혹은 까뮈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지만, 책임감이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라는, 교장선생님의 훈시 같은 말을 새길 필요는 더 더욱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자유는 자기 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