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싹 키우려 또 날아가야죠”
▲ 남미를 방문한 천풍조 8단이 지도 대국을 두고 남미 한국기원에 들르는 등 현지 바둑계 분위기를 살폈다. |
천 8단이 바깥으로 눈을 돌린 것은 1985년. 미국 바둑협회의 초청을 받아 제1회 미국 바둑 콩그레스에 참가하면서부터다. 서양인 그리고 해외 동포들에게 우리의 바둑과 바둑문화를 보급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깨우친 것. 개안이었다. 이후 천 8단은 해마다 여름이면 태평양을 건너가 미국과 캐나다 곳곳을 누볐다. 그 세월이 10년이고 독학과 실전과 몸으로 익힌 영어가 이제는 불편함이 없다.
1991년에는 러시아 쪽의 길이 열렸다. 러시아 바둑협회가 볼가강의 유람선 위에서 바둑대회를 개최하면서 천 8단을 초청했다. 바둑도 바둑이지만 그 역사의 파노라마와 문화예술의 향기에 끌려 러시아는 물론 우크라이나 같은, 옛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들까지를 훑었다. 그러면서 러시아어를 익혔고, 그것도 이제 불편함이 없다.
1995년부터는 유럽 콩그레스를 전후한 시기에 유럽을 돌았고, 2000년 시즌부터는 호주와 뉴질랜드로 다시 보급의 영역을 넓혔다. 이제 남은 지역은 서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미였다. 그중 우선은 남미였다. 서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가 풀은커녕 씨조차 제대로 뿌려지지 않은 곳인데 비해 남미는 그래도 제법 바둑 역사도 있고 바둑을 두는 우리 교민들도 있다. 그걸 이번에 이루었다. 세계를 향해 여행 배낭을 꾸리기 시작한지 25년 만의 일이다.
남미의 바둑도 미주와 유럽이 그렇듯 출발은 일본에 의해서였다. 브라질 바둑협회가 설립된 것이 1982년이고 상파울루에 바둑회관이 생긴 것이 1987년인데, 협회를 만들고 회관을 세우고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저 유명한 일본인 프로기사, 천 8단이 바둑보급의 표상으로 삼고 존경한다는 이와모토 가오루(岩本 薰) 9단이었다.
남미의 바둑계는 천 8단의 말에 따르면 “현재는 좀 시들시들한 상태”라는 것. “일본은 예전처럼 지원하지 않고, 실력으로 주도하던 우리 교포들은 나이를 많이 먹었으며 중국은 아직 이렇다 할 액션이 없다”는 것. 그러나 천 8단은 “그래도 희망은 있다. 길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희망의 싹을 보고 왔다”고 힘주어 말하는데, “무엇보다도 열악한 여건일망정 맥을 잇고 있다는 것이 희망의 증거”라는 것이다.
“10월 8~11일에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제12회 ‘이베로(Ibero) 아메리카 바둑대회’가 열렸습니다. 실력들은 낮지만 분위기는 뜨거웠지요. 칠레에서 바둑대회가 열린다는 것, 12년씩이나 이어져왔다는 것 자체가 사실 대단한 일입니다. 상파울루의 일본인 기우회는 등록회원이 500명이나 되고, 브라질의 한인기우회는 1987년에 생겼으니 브라질의 ‘공식 바둑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셈입니다. 기우회가 지금은 낡은 건물 지하에 세 들어 있고 그나마 월세 부담이 만만치 않지만, 한때는 활기가 넘쳤고 교민사회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교민 기우들은 그때의 호황을 그리워하며 포기하지 않고 재건을 꿈꾸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계기, 그리고 지원이지요. 이런 와중에 박윤석 씨 같은 분이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0대 초반인데 아마6단 정도니 상당한 실력이지요. 이 분이 현지 대학교 교수들과 청소년들에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게 여의치 않으나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반짝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 부임해 있던 이경렬 천주교 신부가 아마3단의 애기가였고, 이 신부가 성당배 바둑대회를 개최하는 등 바둑을 통한 대 교민 봉사와 지원에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교민들은 그런 사람이 다시 와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신부는 귀국해 현재 대전시 교구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남미권에서는 역시 브라질이 바둑 인구도 제일 많을 겁니다. 약 2000명으로 추산하는데, 2000명이면 우리 눈에는 미미한 숫자겠지만, 희망의 불씨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최근엔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같은 나라에서도 바둑이 움트고 있습니다. 특히 페루는 우리와 지난번에 FTA를 체결하는 등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양국의 경제-문화 교류에 바둑이 한몫 거들 수 있을 것이고, 저도 내년부터는 방금 말한 나라들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천 8단은 바둑 해외보급 얘기가 나오면 늘 열변이 된다. 그나저나 천 8단의 바둑여행은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2~3년 후에 그를 만나면 그때는 또 포르투갈 말, 스페인 말을 불편 없이 할 것이다. 천 8단은 프로기사가 아니었으면 가수가 되었을 사람. 타고난 끼와 목소리에다가 수십 년 내공으로, 팝이나 가요는 물론이고, 오페라 아리아 수십 곡을 즉석에서 불러 제치는 실력이다. 2~3년 후 어느 날엔가는 분명히 브라질이나 칠레의 어느 해변에서 남미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