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외가는 백제계” 한국과 친밀감 표시
▲ 아키히토 일왕과 미치코 왕비. |
지금의 아키히토 평성(平成) 일왕은 1933년 히로히토 쇼와(昭和) 일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3세부터 일본의 규정에 따라 부모와 떨어져 아카사카 영빈관에서 홀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은 왕실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자들을 부모 곁에서 자라게 했다.
그는 1940년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했으나 1944년 2차 세계대전의 전화가 심화됨에 따라 동생 마사히토와 함께 도쿄를 떠나 도치기현 닛코시의 왕실 별저에서 칩거했다. 2차대전 말기에는 일본 전 지역이 미군 폭격으로 초토화되다시피 했고, 1945년 3월 10일 “일본을 석기시대로 되돌려놓겠다”고 말한 르메이 장군이 지휘한 소이탄에 의한 대공습은 도쿄를 불바다로 만들고 하루저녁에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는 히로시마 원폭보다 많은 사망자였고, 심지어 스미다강이 끓는 물이 될 정도였다. 히로히토 일왕은 평소 실제와는 다른 보고를 받곤 했는데 폭격 다음날 그 참상을 시찰하고 ‘전쟁 종식’으로 마음을 정하게 됐다고 한다.
히로히토 일왕에 대한 전쟁 책임을 묻자는 호주 등 연합국의 압력과 일왕 없이 일본 통치는 불가하다는 판단 하에 일왕을 살리려는 맥아더 원수의 노력 사이에서 왕권은 기로에 놓였지만 결국 왕실 유지로 결정이 났다. 개전 시의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도 자기 책임이라고 밝혔고 도조는 A급 전범으로 다른 6명과 함께 사형됐다.
▲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이 제95차 도쿄IOC총회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
아키히토 일왕은 종전 후 일왕제가 유지되면서 1949년 학습원 고등과에 입학한 후 미국인 가정교사 엘리자베스 바이닝 부인의 지도를 받았으며 1952년 학습원 대학에 입학,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952년 11월 10일 입태자례(立太子禮)를 치르고 왕세자에 올랐으며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에 참석함으로써 본격적인 해외 공무에 나섰다. 특히 1959년 4월 10일 쇼다 미치코와 결혼, 메이지 시대 이래 첫 평민 출신 왕세자비를 탄생시켜 전 국민적인 붐과 함께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쇼다 미치코 왕비는 궁중생활이 너무 압력이 강했던지 한 1년간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다. 1975년 왕세자비와 함께 오키나와를 방문했다가 화염병 테러 미수로 아찔한 순간을 겪었음에도 의연히 대처하여 오키나와에서 많은 지지를 얻기로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많은 전통을 깼다. 1500년 전통을 깨고 평민을 왕비로 맞이했고, 세살이면 별거해야 했던 황태자를 부모 밑에서 교육시키게 하였다. 처음으로 일본 군주가 재위기간 중 외국을 방문했다. 또 1975년에는 미국을 방문하고 1986년에는 히로히토 왕의 재위 60년 기념식전도 거행했다. 스포츠도 좋아해 왕세자 시절 미치코 왕비와 테니스 데이트를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필자가 아키히토 일왕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85년 고베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 때였다. 당시 그는 왕세자였고, 한국과 일본은 서먹서먹한 사이에서 점차 나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사람 하고는 그런데서 악수를 안 하는 것이 일본 왕실의 관례인데 동양인이지만 외국인인 까닭에 필자와는 악수를 했다.
그 후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때는 지금의 나루히토 왕세자가 왔는데 일본 의전에 따라 사마란치와 필자는 현관 입구에 서서 기다려야 했다. 사마란치가 “우리가 왜 이렇게 오래서서 기다려야 하느냐”고 필자에게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했다. 나루히토도 처음에는 일본사람인 줄 알고 나와는 악수를 안 하려다가 알아차리고 악수를 하고 대화를 나눴다.
1995년에 필자가 NHK 초청으로 스모 경기 15일 기간 중 8일째 스모 해설을 한 바 있다. 일본 스모가 국기가 된 것은 일왕의 후원 덕이었다. ‘15일 스모 경기’는 1년에 6번 있는데 필자가 갔을 때는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왕세자와 세자비가 와서 참관했고 기타노우미 스모협회장이 옆에서 설명했다. 40% 시청률이었고 스모 경기 후에 “세리나”에서 사쿠라우치 중의원 의장, 하라다켄 의원 등과 만찬을 했다. 일본의 특성은 역사, 문화, 전통을 바탕으로 근대화하고 진화하고 더 발전한다는 것이다.
2001년 오사카 제3회 동아시아경기대회에는 다카마도 왕자 내외가 참석해 이소무라 시장, 필자 내외 그리고 하시모토 문무대신(지난 내각의 외무대신)을 만찬에도 초대해 주었는데 굉장히 국제적인 이미지를 풍겼다. 1990년 뉴오타니 호텔에서 열린 IOC총회에도 일왕과 왕비가 참석하여 IOC 위원들을 따뜻하게 맞이 해주었고 19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때는 일왕이 왕비와 함께 나가노까지 와서 개회식에 참석해 개회선언을 했다. 일왕을 여러 차례 만났어도 정치이야기를 하는 것은 못 봤다. 늘 신선하고, 온화하고 덕이 있는 표정이었다. 일본 왕실은 또 스포츠나 문화행사뿐 아니라 지진 등이 일어나 국민이 어려울 때도 직접 나서서 아픔을 위로한다.
▲ 필자 부부가 일본 아키히토 일왕 부부와 악수하고 있다. |
아키히토 일왕은 2001년 68세 생일 때 기자회견에서 천황의 모계혈통이 백제계라는 사실을 이례적으로 언급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자신의 조상 간무 일왕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가사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속 일본기>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속 일본기>는 793년 당시 간무 천황이 펴낸 역사서로 간무 일왕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직계후손인 화씨 부인이라고 적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또 무령왕 당시부터 일본에 5경박사가 대대로 초빙되었으며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궁중의식에 한국에서 전해온 의식이 남아 있다.
1993년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일본의 안자이 체육회장 내외를 초청했다. 그 답례로 요코하마 신경기장(월드컵 결승장소)에서 개최된 일본의 전국체육대회에 참석해 각 현의 지사들과 만났다.
안자이 체육회장 부인은 미치코 왕비의 6세 아래 친누이 동생이었다. 그래도 프로토콜(Protocol)은 엄격했다. 일본 왕실은 일본인과는 악수를 안 하고 서서 미소로, 그리고 머리짓만 할까말까 한다. 미치코 왕비와도 몇 번 접했는데 영어도 잘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미치코 왕비는 대마도에 갔는데 부산 등불이 밤에 보여서 놀랐고 한국이 그렇게 가까운 나라인 줄 몰랐다고 하면서 친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일관계의 미래를 표현한 것이다. 나는 그 후 한일관계가 좋았다 나빴다 하는 가운데 나빠질 때는 꼭 그 말을 떠올렸다.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많은 그 황후도 지난 10월에 희수(77세)를 맞이하고 국민의 축복을 받았다.
가장 최근인 2008년 게이오대학교 150주년 기념식전에도 국왕내외가 임석하여 축사를 했다. 그전에도 국왕이 와세다대학이나 게이오대학에 임석한 적은 있었지만 국왕내외가 요코하마 히요시에 있는 캠퍼스 게이오대학 식전에 참석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게이오대학 히요시 캠퍼스는 교양학부가 공부하는 곳으로 2차대전 말기에는 본토 결전에 대비해서 해군본부가 어마어마한 굴을 많이 파 놓은 것이 최근에 공개되었다. 그래서 당시 미 공군이 대폭격을 받았던 것이다. 게이오대학 히요시 캠퍼스에는 국제규격의 육상경기장, 럭비장, 축구장, 1만 명이 들어가는 체육관 등 체육시설이 마련돼 있어 상당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국왕은 또 2002년 월드컵 축구 결승이 가나가와 국립경기장에서 거행될 때도 참석했다.
지금의 아키히토 일왕은 쇼다 미치코 왕비 사이에 나루히토 등 2남 1녀를 두고 있다. 일본 왕실은 늘 초연하게 행동한다. 2016년 도쿄 하계올림픽 유치전에 ‘유럽 왕실과 가까운 일본 왕실이니, 왕세자라도 끌어드려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거나, 혹은 코펜하겐(Copenhagen)총회까지 모시고 갔으면’ 하고 이시하라(石原) 도쿄도지사가 무척 내각을 통해 애를 썼지만 국내성은 허용하지 않았다. 초연하게 이미지 손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125대를 내려온 일본 국왕은 관용, 검소, 성실 3가지로 추앙받는다. 그렇게 오래된 왕실은 세계에 없다. 그동안 일본 국민의 상징으로서 국민통합을 이뤄왔다. 서양말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일본 왕실에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겠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