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배상’ 회장 징계 낮춘 배경으로 꼽혀…안내문구 피해자 권리 제한 지적에 은행 측 “책임회피 아냐”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건물 내 ‘우리은행 금융감독원지점’ 간판이 묘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사진=박은숙 기자
#금감원, 우리은행 징계 낮춘 배경은?
4월 8일 금감원은 3차 제재심의위원회(제재심)를 열고 우리은행의 라임자산운용 펀드 환매 중단 사태 관련 징계 수위를 최종 결정했다.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당시 우리은행장)은 당초 통보된 ‘직무정지’에서 ‘문책경고’로 징계 수위가 한 단계 내려갔다. 기관인 은행에 대해서는 일부 영업정지 6개월을 3개월로 단축하고 과태료를 부과하기로 했다. 금감원장이 이번 제재심 결정을 결재하면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 심의와 금융위 정례회의 의결 등을 거쳐 최종 확정된다.
이 같은 중징계 안이 최종 확정되면 손태승 회장은 향후 금융권 재취업이 불가능하다. 금융회사 임원에 대한 제재 수위는 △해임권고 △직무정지 △문책경고 △주의적경고 △주의 등 5단계로 나뉜다. 문책경고부터는 중징계로 분류된다. 중징계를 받은 날로부터 문책경고는 3년, 직무정지는 4년, 해임권고는 5년간 금융사 신규 임원 선임이 제한된다.
손태승 회장은 행정소송 등 법적 대응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1월 금감원으로부터 파생결합펀드(DLF) 판매 책임과 관련해 문책경고를 받자마자 중징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지난해 3월 임기 3년의 회장 연임에 성공했다.
징계 수위가 낮춰진 배경으로 선제적으로 피해자 구제에 나선 것이 꼽힌다. 3월 15일 우리은행은 임시 이사회를 개최하고 라임 펀드 관련한 금감원 분조위의 조정안을 수용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손실이 확정되지 않은 펀드에 사후정산 방식의 손해배상을 적용했다. 이는 은행권에선 첫 사례다. 분쟁조정안과 관련된 라임 펀드는 환매 연기된 Top2, 플루토, 테티스 등으로 약 2703억 원 규모다. 우리은행은 투자 경험, 판매사 위반 여부 등 투자자별 가감요인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배상비율(40~80%)을 산정해 배상금을 지급할 방침이다. 앞서 2월 분조위는 우리은행의 라임 펀드에 55%의 기본 배상 비율을 적용하기로 했다.
실제 KB증권도 피해자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박정림 대표의 징계 수위가 ‘직무정지’에서 ‘문책경고’로 낮춰진 사례가 있다. KB증권은 지난해 7월 라임 펀드 투자자들에게 40% 선지급을 결정했고, 올해 1월에는 사후정산방식으로 투자손실의 40~80%를 배상하라는 분조위의 권고안을 수용했다.
#형사 고소·고발까지 취하하라?
하지만 우리은행이 분조위 결정에 따른 자율조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뒷말이 나오고 있다. 우리은행이 피해 고객들에게 자율조정 관련해 보낸 안내문에는 “우리은행 또는 우리은행 임직원 등에 대해 제기한 금융감독원 민원, 형사 고소·고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등 민원, 소송, 신청 등을 취하해주셔야 본 자율조정 절차에 참여할 수 있다”고 기재돼 있다.
또 안내문에는 “자율조정에 동의하는 동의서를 작성 및 제출하심으로써, 이후 우리은행, 우리은행 임직원 등에 대해 금감원에 대한 민원, 형사 고소·고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등 일체의 민원·소송·신청 등을 제기하지 않는 것에 동의하시는 것”이라는 문구도 포함돼 있다. 다만 자율조정 이후 사법당국, 금감원 분조위 등 공적 기관이 펀드 판매계약에 관한 무효 또는 취소를 결정하면 우리은행에 추가적인 자율조정을 요구할 수 있다고 단서 조항을 달았다.
안내문의 이 문구가 금감원 분조위의 결정에 반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라임 펀드 관련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법무법인 한누리는 “우리은행의 안내에 의하면 고객이 자율조정에 응할 경우 매매계약의 무효 또는 취소에 따른 청구권을 사법기관, 금감원을 통해 행사하는 것은 원천 봉쇄된다”면서 “고객은 공적 기관이 무효, 취소를 결정한 경우에 한해 우리은행을 통해서만 추가적인 자율조정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데, 이는 계약 무효 또는 취소에 따른 고객의 청구권 행사를 보장한 분조위 결정 취지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금감원은 분조위 결정에 관한 보도자료를 통해 “검사‧수사 등에서 계약 취소 사유가 확인되면 손해 확정 전이라도 계약 취소를 위한 분쟁조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관련 분쟁조정결정서에는 “자산운용 및 일부 판매사 임직원의 사기 혐의 등에 대한 검찰 수사 및 재판 절차가 진행 중이다. 강제조사권이 없는 조정절차에서 기망의 고의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사정을 감안할 때, 본 위원회가 현 시점에서 사기에 의한 계약 취소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며 “본 조정결정은 피해자가 우리은행에 펀드의 수익증권 매매계약의 무효 또는 취소에 따른 청구권을 행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고 기재됐다.
우리은행 라임 펀드 한 피해자는 “자율조정 전에 소송·민원 등을 취하하라는 건 부당하다”며 “고령의 피해자들이 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만 듣고서 동의서를 무조건 제출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이 배포한 라임펀드 관련 자율배상 안내문.
수사 및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형사 고소·고발 취하를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자율조정에 형사 고소·고발까지 포함되는 건 피해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의도”라고 말했다. 한누리 측도 “우리은행에 관한 수사가 진행 중이고, 우리은행 및 관련 임직원에 대한 형사사건 진행 경과에 따라 계약취소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음에도,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뿐만 아니라 형사 고소·고발까지 취하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KB증권도 유사한 문구 넣어 논란
앞서 KB증권도 라임 펀드 분쟁조정 관련 동의서에서 유사한 문구를 넣어 논란이 일었다. KB증권은 자율배상에 동의하면 임직원에 대해 진행 중인 수사나 비동의 고객 소송 결과에 따라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피해자들에게 안내했다. 특히 수사를 비롯한 형사 소송을 계약의 무효·취소 여부나 배상비율을 판단할 때 고려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KB증권은 논란이 일자 향후 재판 결과 등에 따라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지침을 바꿨다.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제53조2항 등에 따르면 ‘법원에 제소된 사건’이 없어야 조정이 가능하다. 다만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 제39조 등에 따르면, 조정안을 수락한 경우 그 조정안은 재판상의 화해와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고 명시돼 있다. ‘재판상의 화해’는 민사상의 문제만 해결됐다는 의미라는 것이 피해자 측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 우리은행 관계자는 “소송·민원 등을 취하하는 것에 대해 선후관계가 큰 의미가 없다. 금융기관으로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거나 유리하게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번 분조위 배상안도 최대한 빠르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고객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취지에서 수용하기로 결정했다”며 “법원에서 계약 무효·취소 결정이 나오면 추가적인 자율조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문항까지 넣었다”고 말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