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실력 행사’로 다시 안갯속
▲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왼쪽)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현대건설 인수전이 복잡해진 것은 일차적으로 채권단에 책임이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채권단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결론 냈어야 할 자금 출처 문제를 정확히 살펴보지 않아 논란의 빌미를 제공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그룹이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았다는 1조 2000억 원과 동양종합금융으로부터 투자받은 8000억 원의 정체다.
현대차그룹과 채권단 일각에서는 현대그룹 계열사 현대상선의 프랑스 법인 계좌에 있는 1조 2000억 원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자본금 33억 원의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이 무담보 무보증으로 1조 2000억 원을 대출받았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차와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재무적 투자자인 동양종금으로부터 유치한 8000억 원과 관련한 계약 조건에 대해서도 석연치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동양종금 자금에 대해 현대건설 인수 후 2년 9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동양종금이 현대그룹 계열사에게 현대건설 주식을 되사줄 권리(풋백옵션)를 요구하면 현대상선이 이를 협의한다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현대그룹이 시가 대비 2배 이상의 높은 입찰가격을 제시했고, 현대그룹 자금사정이 현대건설을 인수할 정도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을 따져볼 때 투자 수익률이나 담보·보증 제공과 관련해 이미 이면계약(풋백옵션 등)이 체결됐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과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이 연주 현씨 종친인 점을 들어 두 오너의 개인적 친분관계가 이번 투자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색다른 관측도 제기된다.
어쨌든 채권단은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이미 살펴봤어야 할 이러한 기본적인 물음들을 간과함으로써 인수전을 혼돈 속으로 몰고 갔다. 게다가 채권단 내에서도 의견의 일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외환은행이 돌연 현대그룹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바람에 더 큰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채권단의 부실한 검증은 현대차그룹의 더 큰 반발도 불러왔다. 현대차그룹은 자금 출처 의혹이나 MOU 체결 과정의 문제 등을 지적하며 그동안의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현대그룹과 채권단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특히 현대그룹과의 MOU를 주도한 외환은행에 사실상 보복성 조치를 취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그동안 주거래은행이었던 외환은행에 예치되어 있던 1조 원대의 예금을 이미 회수했으며 직원들의 급여통장도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실력행사를 하기 시작했다. 금융권에서는 다른 범현대가 기업들 역시 외환은행과의 거래 중단에 나설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그간 말을 아끼다가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된 배경에는 정몽구 회장의 의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현대그룹, 특히 ‘제수씨’ 현정은 회장과의 갈등이 부각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자금 출처 의혹이 불거진 데다 현대그룹이 법원에 명예훼손과 손해배상청구 소송 등을 제기하자 정 회장은 이를 사실상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강공 전환을 지시했다고 한다.
▲ 계동 현대건설 본사 사옥.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채권단 측에는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으로부터 받은 대출 확인서를 지난 3일 제출했다. 현대그룹은 그동안 대출계약서를 제시하라는 채권단의 요구를 거절해 오다 이날 ‘계약서’가 아닌 ‘확인서’를 제출한 것. 대출 확인서에는 △계좌에 들어있는 자금은 대출금이며 △현대건설과 현대그룹 계열사 주식이 담보로 제공되지 않았고 △현대그룹 계열사가 대출에 대해 보증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채권단이 요구한 계약서가 아닌 확인서를 낸 것에 대해서 현대그룹 측은 “대출계약서는 사상 그 유례가 없고 통상 관례에 완전히 벗어난 요구로 MOU상 채권단과 합의한 합리적인 범위에서 벗어난다”고 설명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M&A 역사상 계약서를 요구한 전례가 없었다”며 “대출확인서만으로 충분한 법적인 효력이 있다고 본다”고 보탰다. 이는 채권단이 제시한 기한까지 대출계약서를 제출할 의사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확인서만으로는 그동안 현대차와 정책금융공사가 제기했던 의혹을 해명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상황이어서 채권단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현대차 측은 곧바로 “항간에 자금증빙만을 위한 초단기, 고율의 일시 대출이니, 제3자의 담보나 보증이 들어간 것이니 하는 등의 의혹이 무수히 제기되어 있는 만큼 현대그룹은 대출계약서와 일체의 관련서류를 제출하여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즉각적인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자격 취소와 양해각서 해지를 주장했다.
채권단이 대출 확인서를 대출계약서에 준하는 소명자료로 받아들인다면 현대그룹이 승리의 고지에 한 발 다가서는 셈이다. 반대의 경우, MOU 해지 국면으로 넘어가고, 현대차에 그랬던 것처럼 현대그룹은 곧바로 채권단에 대한 대대적인 소송전에 돌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현대그룹 내부에서는 현대그룹 인수가 무산되는, ‘만약의 상황’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재계 일각에선 관측하고 있다. 이른바 ‘출구전략’이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의 인수에 사활을 걸었던 것은 핵심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목적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건설 인수가 무산된다면 현대그룹의 다음 수순은 당연히 현정은 회장의 그룹 경영권 방어다.
이와 관련해 지난 한 달간 현대그룹 계열사 간 미묘한 지분 변동이 있었다. 먼저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다음날인 지난 11월 17일 현대차그룹에 부품을 납품하는 한국프랜지공업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19만 5596주(2.74%) 전량을 스위스 엘리베이터 회사인 쉰들러에 장외 매각했다.
이번 딜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31.57%를 보유하게 된 쉰들러는 지난 2006년 3월 KCC 등 범현대가로부터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를 넘겨받으며 2대주주가 된 회사. 쉰들러는 그동안 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현대그룹과 우호·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쉰들러 측은 이번 주식 매입 목적에 대해서도 ‘제휴관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발행회사의 경영진과 긴밀하게 협의하여 사업을 진행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무리 우호세력이라고 하더라도 쉰들러의 지분율은 현대그룹 측에 위협적이다.
이 때문인지 현대엘리베이터 최대주주(특수관계인 포함)인 현대로지엠(옛 현대택배)도 곧바로 지분율 확대에 나섰다. 현대로지엠은 지난 11월 24일부터 12월 1일까지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7만 2000주(1.01%)를 매입, 보유 지분율을 종전 24.38%에서 25.39%(특수관계인 포함 전체 지분율 49.23%)로 높인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실패에 대비해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현대건설 인수전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실탄’ 소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그룹 관계자는 이에 대해 “계열사에서 진행한 일로, 그룹 차원에서는 알지 못하고 할 말도 없다”며 사실상 부인했다.
현대그룹이 대출계약서 대신 확인서 제출이라는 카드를 내밀면서 공은 다시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일단 현대그룹이 제출한 서류는 채권단이 MOU상 요구했던 무담보 무보증 대출금 요건에는 부합한다. 그러나 채권단이 요구한 대출계약서 요구에는 불응한 것이기 때문에 채권단의 고민도 깊을 수밖에 없다. 채권단이 이 카드를 받아들이면 현대차가 채권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태세다. 앞서 언급했듯 반대의 경우라면 현대그룹 측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번 현대건설 인수전의 향배는 법원의 판단에 맡겨질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