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시스템’ 덕에 최강멤버 구축?
▲ 지난 1일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목진석 9단(왼쪽)이 4연승을 질주하던 씨에허 7단을 맞아 대역전승을 거뒀다. 그러나 다음 날 벌어진 일본 주자와의 경기에서 아쉽게 패했다. |
정말 김연아처럼 되면 좋겠다. 바둑에서도 타이틀이 됐든 광고 모델이 됐든 수억, 수십억 대박 얘기가 나오면 좋겠다. 바둑이 체육의 옷을 입으려고 애쓰는 마음과 과정과 주변의 격려 한쪽에는 그런 열망이 있다. 바둑은 국제무대에서의 성적으로 우리의 자긍심에 기여한 공헌도와 동호인 숫자에 비해 아직도 돈 하고는 거리가 있다. 고소득의 스타들도 많이 늘어나 사실은 꼭 그런 건 아닐지 모르지만, 체감은 그렇다. 이슬아가 여전히 상대적으로 가난한 바둑계의 오랜 비원을 실현하는 대박의 물꼬를 터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문제는 광고들이 원하는 모델이 과연 이슬아 같은 순백의 여성일까 하는 것, 그리고 이슬아가 과연 언제까지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게 걸린다. 기대는 하되 실망의 폭을 줄이려면 조급해 하지 않으면서 기대의 크기도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바둑은 승자 독식의 세계이고 바둑판은 4각의 정글이라고 하지만, 연예계나 광고계는 비유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적자생존의 밀림이라고들 하니까 말이다.
두 번째는 랭킹시스템 고안자인 미국 스탠퍼드대의 배태일 박사(66)가 보내온 아시안게임 관람기다. 우리가 난적으로 여겼던 중국을 어렵지 않게 물리치고 금메달을 석권한 것은 선수 선발과 훈련, 여성 기사들의 실력 향상과 투지, 코칭 스태프의 헌신과 현지에서의 절묘한 오더 작전 등이 잘 어우러진 결과물인데, 그중에서도 선수 선발에서 철저하게 랭킹을 적용하면서 선발전을 치른 우리가 랭킹도 따른 것도 아니고 선발전도 치르지 않은 중국을 이겼다는 것이다.
아시안게임에 나온 중국 팀에서 콩지에 9단, 저우루이양 5단, 구리 9단, 씨에허 7단은 랭킹 1~4위였지만, 창하오 9단과 류싱 7단은 각각 14위와 13위였는데, 그들 대신 랭킹 5위의 왕시 9단과 6위의 퉈지아시 3단이 출전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
지난해 타이틀을 딴 기사가 이후 성적을 못 낸 경우와 타이틀은 없었으나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특히 최근 성적이 좋은 기사가 있다면 당연히 후자를 뽑아야 하는 것이며 최근 성적에 가중치를 주는 우리 랭킹 시스템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배 박사 자신의 말처럼 약간 자화자찬이기도 하고, 그의 열변에서는 그동안 자신이 애써 만든 과학적 랭킹 시스템에 대해 누리꾼들이 그 장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어렵다, 현실감이 떨어진다 등으로 비판하던 것에 마음고생을 좀 했던 흔적도 묻어나는데, 어쨌든 일리가 있다.
아시안게임 직후에 벌어지고 있는 농심배도 현재 상황으로는 배 박사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느낌이다. 농심배 출전 선수는, 한국은 이창호 이세돌 목진석 최철한 9단 박승화 4단이, 중국은 콩지에 왕시 9단 씨에허 7단 저우루이양 5단 퉈지아시 3단이, 일본은 유키 사토시, 하네 나오키, 다카오 신지, 야마시타 게이고, 이야마 유타 9단, 사카이 히데유키 8단이 출전했다.
출발은 우리가 좋았다. 이세돌 9단이 중국의 신진강호 왕시 9단과 일본이 국제대회에서 1승이라도 건지겠다는 비장의 각오로 내세운 이야마 유타 9단을 꺾고 2연승으로 달리자 “최근 이 9단의 기세로 보아 혹시 서봉수 9단의 진로배 9연승 대기록을 갈아 치우는 10연승?” 그런 신화를 상상하는 팬들도 있었는데, 중국의 씨에허가 팬들의 꿈을 지워버렸다.
씨에허는 얼마전 아시안게임에서 혼성복식은 박정환-이슬아에게 졌고 단체전에서도 예선-본선 두 판을 다 패해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을 것이고, 사기도 바닥일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이미 아시안게임 이전에 이세돌의 연승을 저지했던 씨에허는 일본의 사카이 8단과 한국의 박승화, 다시 일본의 호감 가는 신사풍의 하네 나오키를 연파하며 4연승으로 질주했다. 그 기세가 사뭇 무서웠고 이번 농심배는 씨에허의 스타탄생으로 막을 내릴 것 같았다.
한국의 세 번째 주자는 목진석 9단. 흑을 든 씨에허가 초반에 점수를 올렸고 계속 리드했다. 목진석이 백진을 크게 키웠으나 씨에허가 들어가 살면서 바둑은 더 기울었다. 백도 흑진 속에 승부수를 날렸는데, 그게 모두 잡히면서는 끝이었다. 거기서 목진석은 괴수-강수-묘수를 연발하면서 바둑을 뒤집었다. 그런 바둑을 역전승하면 운도 트이는 법이건만 목진석은 일본의 다카오 신지에게 걸려 1승에 그치고 말았다.
남은 사람은, 한국은 이창호 최철한, 중국은 콩지에 저우루이양 퉈지아시, 일본은 다카오 신지, 유키 사토시. 중국이 여유가 있다. 상위 랭커 가운데 3위인 구리 9단만 빠지고 1-2-4-5-6 등이 출동한 것이 이유이고, 그래서 중국이 우승컵을 가져간다면 아시안게임과 농심배, 한두 번의 결과를 놓고 예단하기는 이르지만, 그래도 배태일 박사의 이론은 다시 한 번 힘을 받을 것이다. 귀추가 주목된다.
그런 중에 일본이 살아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반갑다. 다카오가 목진석을 꺾은 것은 일본 팀이 농심배에서 실로 오래간만에 맛보는 꿈 같은 1승인 데다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의 야마시타 게이고는 구리와 이창호에게 이겼고, 이야마 유타는 이세돌을 꺾었다. 한없이 지다가도 한두 번 이겨보면 자신감이 생긴다. 지는 것도 습관이고 이기는 것도 습관이다.
일본이 살아나기를 바란다. 바둑이 체육이 되는 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중국의 ‘바둑 체육’은 바둑의 격을 떨어뜨리는 감도 있다. 바둑이 일본의 예도로 돌아가기는 힘들게 되었다 하더라도, 일본 바둑이 살아나고 한국 바둑이 중용을 지키면서 바둑이 체육과 예도의 조화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둑은 체육 종목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체스 장기 브리지 등과 손을 잡고 ‘마인드 스포츠’의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기를 바란다. 체육 쪽에서 저 뒤에 줄을 서는 것보다 ‘마인드 스포츠’에서 제일 앞에 서는 것이 좋은 것 아닌가.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