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카드’ 불발…회장할 회장 없수?
▲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열린 대기업총수 초청 조찬간담회에 참석한 대기업 총수들과 이명박 대통령. 지난 13일 올해 처음으로 열린 회장단 회의에 4대기업 총수들이 모두 불참해 전경련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전경련 측에서 차기 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수차례 고사의사를 밝히더니 결국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회장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활동과 그룹 경영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용현 회장의 경우 이례적으로 보도자료까지 내면서 “차기 회장 제의나 추대가 들어와도 맡을 수 없다는 생각은 확고하다. 지금은 그룹 경영에 전념할 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도 전경련 회장직에 뜻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차 측은 “경영에 전념할 것”이라며 정 회장의 뜻을 간접적으로 전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99년 이른바 ‘반도체 빅딜’ 이후 전경련에 아예 발길을 끊고 있는 상태다. 재계 3위인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이제 갓 쉰을 넘긴 나이(1960년생)여서 연장자를 우대하는 전경련 내 분위기에서 회장직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SK 역시 이 부분을 들어 최 회장이 전경련 회장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으로서는 다른 총수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오히려 좋은 핑곗거리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전경련이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전경련 회장은 우리나라 대기업 총수들의 대표 자격으로서 전경련 회장단회의를 주재하고 정부에 재계의 입장을 전달한다. 또 재계의 의견을 조율해야 하는 것은 물론 때론 정치권에 쓴 소리도 하고 갈등을 조정하기도 해야 한다. 전경련 회장을 ‘재계총리’라고 일컫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권한과 명예만큼 책임과 부담이 크다. 우리나라 대기업 총수들의 입을 대신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정치권에 마냥 쓴 소리만 하기도 껄끄럽다. 정치권의 생각을 재계에 전달해 설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대기업 총수들이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는 지금과 같은 글로벌 경영 시대에서는 다른 일에 신경 쓰기가 힘들다.
역대 회장들도 대부분 추대 형식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1961년 일본 게이단렌(경단련)을 모델로 창립한 이래 이병철 초대회장부터 31대 조석래 회장까지 13명의 회장이 전경련을 거쳐 갔다. 초대 이병철 회장, 18대 구자경 회장, 28대 손길승 회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연임했으며, 특히 김용완 회장(경방 창업주, 4~5대·9~12대)과 정주영 회장(13~17대)은 10년 동안 전경련을 이끌었다.
이들 회장들도 대개 자의로 전경련 회장을 맡은 것이 아니다. 전경련 회장을 가리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석이 된 회장 자리를 맡으려는 이가 없어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는 룰이 깨지고 있다. 재계의 다른 관계자는 “못하면 체면을 구기고 잘해봐야 본전인 자리를 맡기가 부담될 것”이라며 “경영에 올인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전경련 회장을 맡으려 하겠느냐”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전경련의 위상이 많이 떨어진 것도 한 이유다”라고 말했다.
위상이 떨어졌다는 평가에 대해 전경련 측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정병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지난 13일 전경련 회장단회의를 마친 후 브리핑에서 위상이 낮아진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위상이 무엇이 낮아졌는지 예를 들어보라”며 화를 냈다. 정 부회장은 나아가 “전경련의 위상이 낮아졌다고 하는 기자들을 출입시키지 않고 싶다”는 극단적인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적잖은 재계 관계자들은 정 부회장의 발언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는데 혼자만 아니라고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전경련의 위상이 낮아졌다는 근거는 여러 가지다. 표면적인 현상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일단 조석래 회장 사퇴 이후 6개월간 회장을 추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물론 4년 전에도 진통을 겪긴 했지만 지금처럼 장기간 회장 공석 사태를 경험한 적은 없다.
전경련 회장단회의에 대기업 총수들이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도 전경련의 위상이 떨어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지난 13일 회장단회의에는 4대그룹 회장이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또 회장단 중 참석 인원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바빠서’라는 것이 불참한 측의 설명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전경련이 제 역할을 하고 위상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대기업 회장들이 왜 그렇게 참석하지 않겠느냐”고 꼬집었다.
차기 회장을 선임하지 못한 이유가 전경련의 매끄럽지 않은 일처리에 있다는 지적도 많다. 차기 회장으로 수개월간 이건희 회장 한 명만 바라봤다는 것이다. 정병철 부회장 스스로 정몽구 회장이나 최태원 회장 등에는 접촉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6개월을 공석인 자리에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맡아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에 재계 관계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편으로는 이건희 회장에게 구애를 보내는 까닭이 전경련의 위상을 떨어졌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위상이 되찾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분석도 있다. 재계 1위 기업일 뿐 아니라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을 이끈다면 전경련의 위상은 단숨에 확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이건희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맡은 적이 없어 가능성이 대두되긴 했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초대회장을 역임한 바 있기에 2대에 걸쳐 회장을 맡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김용완 회장과 그 아들인 김각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26~27대)직을 연임한 전례가 있다. 그러나 끝내 이건희 회장이 고사함으로써 전경련 측은 마음이 급하게 됐다.
제32대 전경련 회장은 2월 열리는 전경련 총회에서 의견을 모아 추대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회장 이희범) 회장 선임 과정에서도 보여줬듯 대기업 오너들은 갈수록 경제단체장 자리를 꺼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전문경영인이나 외부 인사 영입도 점쳐지고 있다. 오너가 아니면서 전경련 회장에 오른 이는 홍재선(6~8대, 전 금융조합 이사, 쌍용양회 회장), 유창순(19~20대, 전 국무총리), 손길승(28대, 전 SK 회장) 회장이 있다. ‘하기 싫다고 안 하는 자리도 아니다’라는 말이 깨진 지금 과연 누가 전경련 회장직에 앉을지 주목된다.
임준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