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유일하게 용기를 내서 스스로 글을 기고해 주신 분이 박완서 선생님이죠.”
이문열 씨가 말했다. 그의 어조에는 침묵한 다수에 대한 섭섭함이 배어 있었다. 의외였다. 박완서 씨는 항상 뒤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가들은 세례요한처럼 바른 말을 하고 사회의 십자가를 지는 게 운명인가 보다. 며칠 전 박완서 씨가 세상을 떠났다. 박완서가 쓴 소설을 읽으며 정신적으로 성장했다. 6·25전쟁의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밤이면 문학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그의 수필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남편이 검찰청 조사를 받는 모습을 그린 ‘조그만 체험기’라는 단편소설을 보면서 법조인의 태도를 반성했었다.
좋은 소설가란 어떤 존재일까? 아마도 등불을 손에 들고 한 발자국 앞서 가는 귀한 안내자일 것이다. 동시에 잠든 우리의 영혼을 깨워주는 시대의 풍부한 내용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사회는 그런 문인들에 대한 대접에 소홀했다. 원로 소설가 정을병 씨와 그의 생전에 가깝게 지냈었다. 그는 문학을 종교로 삼고 평생을 하루에 한 끼만 먹겠다고 서원했다. 빈곤을 친구 삼아 문학을 하기 위해서 그랬다. 나는 세상에 오해받고 힘들어 하던 그의 마지막 상황을 지켜봤었다. 한국문학의 시조인 김동인 선생의 처절한 문학인생을 추적하기도 했다. 그는 버려진 채 혼자 굶어죽었다. 우리시대는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낙인을 찍고 있다. 예술을 추구하던 사람들의 마지막 길이 모두 힘든 것 같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십대 경제대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노벨문학상도 타야 하고 소설도 수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문인들을 대접해 주어야 한다. 얼마 전 만해마을을 들렀다가 글을 쓰는 작가의 방을 구경했다. 작가에게 무료로 집필실을 빌려주고 있었다. 이문열 씨도 개인자금으로 후배들을 양성하는 문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규모가 작고 소수다. 문인들이 둥지를 치고 노래 부를 동산들이 대한민국 곳곳에 들어섰으면 좋겠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