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냐 무덤이냐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손 대표로선 영수회담이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전력 시비를 불식시키고, 야당 당수로서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키는 계기일 뿐만 아니라 차기 대선을 겨냥한 야권 내 경쟁구도에서도 최고권력과 맞상대하는 관록을 보태면서 보다 선명한 위상을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반면 회담에서 유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사진찍기용’ 회담이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손 대표 앞에 놓인 이런 극단의 기대와 우려가 당초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간의 영수회담 합의에 발끈하며 청와대와 의제, 시기를 놓고 신경전을 벌여온 배경이다.
손 대표는 지난해 12월 8일 한나라당의 예산안 단독처리에 반발해 두 달 넘게 장외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2월 임시국회를 정상화하는 ‘회군’을 하려면 그에 대한 명분이 필요한 터라 “야당 지도자로서 강하게 나올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예산안 단독처리 문제 뿐만 아니라 지난해 여야간 공방의 이슈였던 청와대 대포폰 국정조사, 4대강 공사 강행은 물론 최근의 물가상승 압력, 전세값 대란, 구제역 방역실패 등 민생 문제에 대한 정부의 실정도 강도 높게 지적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안 있는 야당’을 강조해온 만큼 이 대통령에게 정책적인 주문사항도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 뚜렷한 시각차를 드러낼 분야는 남북관계 문제다. 손 대표는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와 관련해 ‘평화론’의 관점에서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해 이 대통령에게 유연한 대북 인식을 주문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이 대통령이 천안함 침몰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에 대한 “북한의 사과가 전제되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는 원칙적인 입장을 밝힐 경우 두 지도자의 극명한 대립은 절정을 이룰 게 분명하다.
상대 정파의 최고 지도자가 벌이는 영수회담인 만큼 상호 정국 인식차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지만 국가적 현안을 놓고 대통령과 야당 당수가 한 발씩 물러서며 협력하는 모습을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외면할 수 없다는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부담이다. 특히 손 대표로선 자신의 정치인식과 철학을 보여주는 기회이면서, 큰 지도자다운 협상력도 보여줘야 하는 처지다. 너무 많은 양보를 해도, 너무 따져들다 합의를 그르쳐도, 손 대표에게는 “빈손으로 돌아온 회담이었다”는 빈축을 사기 십상이다.
지난 2008년 9월 정세균 전 대표가 이 대통령과 회동한 뒤 나온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는 청와대의 반응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위축됐던 것도 손 대표에게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이번 영수회담은 손 대표에게는 정치적 기회이자 무덤이 될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손 대표에게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여론의 평가다. 이른바 ‘선(先)집토끼론’에 따라 진보노선을 강화하다 중도층의 이탈현상을 낳는 바람에 대표 취임 초반의 지지율 상승세를 유지하지 못한 ‘덫’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야당 리더로서의 선명성도 중요하지만, 이 대통령과 견줄 만한 국가 비전을 짧은 시간의 대화 속에 녹여내 중도층의 시선을 붙잡아야만 한다.
두 사람은 지난 2007년 대선을 기점으로 척을 졌던 사이다. 한나라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그해 3월 5일, 경선 후보였던 이 대통령은 충북지역 방문 중 기자들을 만나 탈당설이 나돌던 손 대표에 대해 “안에 남아도 ‘시베리아’에 있는 것이지만 나가도 추운데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간의 ‘줄 세우기’ 경쟁에 밀려 3위로 뒤처져 있던 손 대표의 처지를 시베리아에 비유한 비아냥으로 해석됐고, 결국 손 대표의 탈당에 직접적인 기폭제가 됐다. 그때 손 대표는 다음날인 3월 6일 “예의와 품격의 빈곤을 드러낸 것”이라고 맞받아쳤고, 강원도 백담사 칩거에 들어간 뒤 같은달 17일 “나는 이제 시베리아로 간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그렇게 ‘시베리아’공방을 벌였던 이 대통령과 손 대표가 거의 4년 만에 대통령과 야당 당수로서 만나 다시 회담을 갖는 것이다. 손 대표의 영수회담 시험날이 다가오고 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