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엔 관대하나 노출엔 엄격하다?
지난 1995년 국내 개봉된 영화 <패션쇼>는 런웨이의 모든 모델들이 올 누드로 출연하는 충격적 라스트신이 압권인 작품이다. 그렇지만 표를 구입한 관객들이 접한 5분여의 라스트 신은 화면 가득 둥둥 떠다니는 모자이크뿐이었다. 다시 4년 뒤 장선우 감독이 <거짓말>을 발표했다. 두 차례나 등급 보류 판정을 받은 뒤 2000년 개봉된 <거짓말>은 제목을 ‘<거짓말>+모자이크’라고 바꿔야 할 만큼 상처를 입은 뒤였다. ‘등급 보류’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2002년 ‘제한상영등급’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탄생했다. 그리고 또 다시 10년. 외설과 예술의 경계, 그 곳에서 영화계와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는 여전히 줄타기를 하고 있다. 가장 최근 제한상영등급을 받은 한국 영화는 배우 이병헌 최민식이 주연을 맡은 <악마를 보았다>(감독 김지운)다. 이 영화는 지난해 8월 개봉 하루 전에서야 언론 시사회를 진행했다. 두 차례나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기 때문. <악마를 보았다>는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국내 첫 상업 영화로 기록됐다.
결국 <악마를 보았다>는 1분 30여 초를 삭제한 후 ‘19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김지운 감독은 “편집한 분량은 전부 1분 30초가량이다. 어느 한 장면을 통째로 삭제한 것이 아니고 장면의 지속 시간을 줄이는 식으로 편집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는 도망간 경철(최민식 분)이 친구가 운영하는 산장에 은신해 있는 장면이 많이 사라졌다. 수정 전에는 사이코패스인 경철의 친구가 인육(人肉)을 다루는 장면이 묘사됐지만 결국 편집되고 말았다. 영등위가 “시신 일부를 냉장고에 넣어두는 장면과 인육을 먹고 개에게 주는 장면 등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현저히 훼손한다”며 제한상영가 판정 이유를 밝혔기 때문.
국내에서 제한상영등급은 사실상 ‘상영 불가’다.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으면 법으로 지정된 제한상영관에서만 걸 수 있지만 국내에는 제한상영관이 없다. 출구 없는 대피로인 셈. 끊임없이 영등위의 영화 등급 심의가 도마에 오르는 이유 중 하나다. 결국 <악마를 보았다>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야 삭제 없이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김지운 감독은 “삭제된 장면이 영화의 흐름 속에서 연상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장면들은 모두 기존에 개봉됐던 유명 영화에 근거해 수위를 따랐다. 그런데 왜 이 영화만 이런 판정을 받았을까 생각했다. 나중에 그 모든 것이 표현의 사실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칭찬으로 생각하기로 했다”고 불편한 속내를 에둘러 표현했다.
<악마를 보았다>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아저씨>(감독 이정범)를 비교해보면 영등위의 심사 기준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잔인함과 폭력성을 따지자면 <아저씨>도 <악마를 보았다>에 못지않다. 칼을 서서히 상대의 몸에 꽂아 목숨을 끊고 인간의 장기를 매매한다. 심지어 소아 납치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아저씨>는 ‘19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두 영화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영상물등급위원회의 평가 항목은 총 7가지다. 주제(유해성 등), 선정성, 폭력성, 공포, 약물, 대사(저속성 등), 모방 위험 등으로 분류돼 심의를 받는다. 각 항목에 대한 평가는 ‘낮음-보통-다소 높음-높음-매우 높음’까지 5등급으로 매겨진다.
<아저씨>는 7개 항목 모두 ‘높음’ 판정을 받았다. 영등위는 유해성이 있고 선정적이며 모방 위험도 높지만 19세 이상 성인이 보기에는 무리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결국 <아저씨>는 ‘19세 이상 관람가’로 개봉돼 6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 모았다.
<악마를 보았다>는 ‘보통’부터 ‘매우 높음’까지 다양한 판정을 받았다. 마약 등 향정신성 약물은 나오지 않아 ‘약물’ 항목은 ‘보통’이었다. 주제 선정성 공포 대사 모방 위험 등은 모두 ‘높음’ 판정. 그러나 폭력성 부분은 ‘매우 높음’으로 분류됐다. 시체를 훼손하고 인육을 먹는 등 장면이 문제가 된 것. 당시 <악마를 보았다>의 배급사인 쇼박스 관계자는 “폭력성이 지나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종의 ‘과락’인 셈이다. 문제가 된 장면을 삭제한 후 제한상영가 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영화등급판정을 두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화두는 바로 ‘노출’이다. 한 영화 관계자는 “영등위는 폭력에는 관대한 반면 노출에는 민감하다”고 말했다. 청소년의 살인을 다루고 조직폭력을 미화했다는 지적을 받은 영화 <강철중:공공의적1-1>이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은 반면 성행위나 가슴 노출이 없는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은 ‘19세 이상 관람가’ 등급이 매겨졌다. 성인 남녀의 불륜과 일탈이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런 판정에 고개를 끄덕일 영화인은 드물다.
노출을 다루는 시선도 상이하다. 지난해 10월 서울고법 행정5부는 영화수입사 월드시네마가 “영화 <천국의 전쟁>에 대한 제한상영가 등급분류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영등위를 상대로 낸 제한상영가등급분류결정취소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남녀 성기 등을 직접적, 노골적으로 노출하는 등 감독이 내세운 의도보다는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2009년 개봉된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에서는 주연 배우 송강호의 성기가 노출돼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송강호는 “긴 시간 굉장히 고민한 장면이다. 일종의 순교적인 행위로 영화에 꼭 필요한 장면이다”고 밝혔다. 영등위도 박찬욱 감독의 속내를 헤아린 듯 ‘19세 이상 관람가’ 등급으로 국내 상영을 허락했다. 영등위가 판단한 ‘선정성’ 등급은 ‘높음’이었다. <박쥐>는 그 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외설’보다 ‘예술’에 방점을 찍었다.
하지만 <천국의 전쟁> 역시 2005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다. 영화진흥위원회 역시 예술영화로 인정했다. 하지만 영등위의 심의기준은 넘지 못했다. 법정 논쟁에서 영등위 변호사는 “해외언론에서 호평을 받았다 해도 등급분류는 관객의 기준에서 매겨지는 것이다. 상영불가판정이 위법하거나 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쥐>와 <천국의 전쟁>의 성기 노출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문제라 납득할 만한 설명이 어렵다. 또 다른 영화 관계자는 “문제가 되는 장면을 조금 수정한 후 개봉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장면 삭제는 감독과 영화 관계자들에게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그래서 법의 심판까지 받는 것이다. 객관적인 기준이 설 수 없는 문제인 만큼 향후에도 영화 등급을 둘러싼 논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고 내다봤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