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요? 진짜 레이스는 지금부터”
▲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지난 1월 30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알마티에서 개막한 제7회 동계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쇼트트랙 대표팀은 설 연휴 안방에 감동을 선사했다. ‘짬짜미 파문’과 승부조작 사건으로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도 금메달 4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수확하며 아시아 최강 자리를 굳게 지켰기 때문. 그러나 아시안게임을 지켜본 많은 이들이 머릿속에 두 남자를 떠올렸다. 중국 선수들을 호쾌하게 앞지르는 질주본능, 반 바퀴를 손쉽게 따라잡는 무서운 저력. ‘절대강자’의 출현을 기대하는 마음은 자연스레 안현수·이정수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끝없는 관심은 선수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기자 앞에 나타난 안현수는 이러한 중압감을 초월한 듯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기억해주는 분들이 있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국내 대회에 출전할 때도 잊지 않고 찾아주시더라. 올림픽,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내 이름이 기사에 거론되는 걸 보고 놀란 것도 사실이다. 부담스럽기보단 덕분에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에 있는 듯 생생한 현장감을 느꼈다. 나는 그렇게 쉼 없이 빙상장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일등으로 질주하다 ‘꽈당’
2006 토리노올림픽 3관왕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던 안현수. 그러나 부상만큼이나 그를 힘들게 한 건 또 없었다. 지난 2007년 훈련 도중 펜스에 부딪힌 안현수는 왼쪽 무릎 뼈와 후방십자인대 부분 파열 부상으로 4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유증은 번번이 부활의 날개를 꺾었다. “대회 나갈 때마다 다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느끼고 좌절도 많이 했다.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겹쳐 자신 있게 스케이트를 타지 못했던 것 같다. 작년 종별 대회 땐 정말 전 종목에서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일등으로 타다가 결승선 앞에서 혼자 블록 밟고 넘어지는 등 그동안 선수 생활 하면서 못했던 온갖 실수들을 다 보여드렸다(웃음).”
2010 전국동계체전에서 3관왕에 오르며 부상의 설움을 떨치는가 했더니 타임레이스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링크장에 혼자 들어가 초를 재고 다른 선수들은 구경하고 있는 상황이 너무 어색했다. 경기를 하면서 예전 감각을 되찾아야 하는데 혼자 타다보니 더 금방 지치더라. 차라리 캐나다 선발전처럼 예선 때 타임레이스를 치른 뒤 결승 때 기존 방식(오픈레이스)대로 선수를 선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선발전 이후부터 컨디션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고. 그러나 아직 복병이 남아있다. “2007년 왼쪽 인대를 다쳤을 때 오른쪽 아킬레스건에 통증을 느껴 3개월 동안 재활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왼쪽 발목이 아프다보니 나도 모르게 오른쪽 다리에 힘을 준 모양이다. 요즘 갑자기 오른쪽 아킬레스건에 통증이 와서 긴장하고 있다. 그래도 체력이 많이 올라왔고 느낌도 좋아 이제 자신감을 갖고 탈 수 있을 것 같다.”
성남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스케이팅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는 안현수에게 ‘저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고생길이 훤하지 않느냐”며 유쾌한 대답을 내놓는다. 아직 은퇴를 생각하고 있진 않다고. 좋은 기량으로 다시 팬들의 앞에 서고 싶단다.
군대서 먹는 초코파이 ‘캬’
“은퇴시기를 정해놓진 않았다. 나이로는 고참 선수에 속하지만 마음은 갓 스케이팅을 시작한 새내기와 다름없다. 2014년 소치 올림픽을 목표로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열심히 하겠다. 응원하며 지켜봐주시라.”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2관왕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기도 전에 ‘짬짜미 파문’에 휘말린 이정수. 그에게 내려졌던 6개월 자격정지 징계가 지난달 19일, 해제됐다. 2월 동계체전을 앞둔 기대감 때문일까. 다시 빙판 위 질주를 시작하는 그의 얼굴에서 부활을 다짐하는 굳은 각오가 느껴졌다. 자격정지 6개월 기간 동안 새로운 경험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별의별 거 다 해봤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팬들이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보내주셔서 독서도 많이 했다.”
가장 색다른 경험은 ‘군대’였다. 이정수는 지난 11월, 4주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는 기초군사훈련 기간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를 하나 둘 풀어냈다. “화생방 훈련을 만만하게 봤다가 정말 큰코다쳤다. 시작할 때 문 앞에서 방독면을 벗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들어가려는데 깜짝 놀랐다. 문 앞부터 가루가 있는 것이다. 결국 그냥 방독면 벗은 채로 들어갔다. 살면서 처음으로 ‘사람이 정말 이러다 죽는구나’란 생각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주는 초코파이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고. “군대에서 왜 초코파이, 초코파이 하는지 알겠더라. 일주일에 하나씩 주는 초코파이를 몇 십 분 동안 입으로 녹여가며 먹었다. 나중에 훈련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초코파이를 하나 사서 먹는데 그 맛이 안 났다(웃음).”
지금까지 쇼트트랙 선수로서 매일 똑같은 운동만 해왔던 그다. 새로운 환경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훈련을 받으면서 오히려 힘들었던 순간을 잊을 수 있었고 새롭게 맘을 다잡는 계기가 됐단다. “난 천재형이 아닌 노력형 선수다. 우리나라 쇼트트랙 선수층이 워낙 두텁다 보니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 대표팀에 선발될 수 없다. 동계체전을 시작으로 다시 즐겁게 스케이트를 시작하려 한다.”
선발방식 변경 안타까워
국가대표 선발전에 새롭게 도입된 타임레이스 제도를 보고 마음이 복잡한 이정수였다. 그는 “어찌됐든 나 때문에 선발 방식이 바뀌게 됐다. 동료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 게다가 타임레이스가 링크장에 혼자 들어가 기록을 재는 방식이기 때문에 선수들이 자유롭게 늦춰 타는 방식으로 오히려 짬짜미가 더 자행될 수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정수는 이번 동계체전에선 500m에 새롭게 도전한다. 전 종목을 고루 잘 타야 대표팀에 선발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열심히 연습할 생각이라고.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차근차근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이번 시즌을 잘 마치고 나면 정식으로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 좋은 성적 거두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찍혔으면 한다.”
쇼트트랙을 향한 두 선수의 뜨거운 열정이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고 있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