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일요신문] 70년 전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이 서울에서 남하하는 주요 통로였기 때문이다. 특히 오산죽미령 전투는 유엔군이 한국에서 벌인 첫 번째 전투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맥아더장군의 회고록에 ‘스미스부대의 오산죽미령 전투는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작전이었다’ 라고 언급을 하고 있다. 오산죽미령 전투는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고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할 수 있는 시간을 번 전투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UN군 치열한 첫 격전지 ‘오산 죽미령 전투’
오산은 예로부터 서울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내려가려면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산성과 인접하고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오산 북쪽의 죽미령(竹美嶺)은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이 서울에서 남하하는 주요 통로로, 저지선을 구축하기 좋은 전략적 위치다.
6·25전쟁 개전 초기 유엔군 지상군의 파병이 결정됨에 따라 미국 제24사단이 7월 1일 한국으로 급파되었는데, 보병 대대장이었던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의 이름을 따 소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져 있다.
7월 5일 오전 8시 16분부터 교전이 시작되어 6시간 15분 동안 전투를 치렀지만 병력과 무기의 열세로 스미스 중령은 14시 30분경 퇴각을 결정했다. 당시 스미스 부대의 피해규모는 181명이 전사, 포로, 실종되었고 북한군은 전사 42명, 부상 85명의 피해가 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스미스 부대가 받은 명령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적의 진군을 최대한 ‘지연’시키라는 것으로, 전투는 비록 패했으나 유엔군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북한은 재정비기를 가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7일간 늦춰 전략적으로 승리한 전투라고 평가하고 있다.
오산 죽미령평화공원‘평화의 상징’으로
오산죽미령 평화공원은 2020년 7월 5일 죽미령 전투 70주년이 되는 날 공식 개장했다. 전쟁의 참화를 넘어 새 시대 평화의 미래를 이루고자 화합과 상생이라는 더 높은 평화를 향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데 의미가 컸다. 전적지로써의 기념 장소를 넘어 보다 미래지향적인 평화를 향해 나아갈 때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더 가치를 발한다는 의미로 평화공원을 조성했다.
오산죽미령 평화공원은 1950년 7월 5일 그날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는 ‘기억의 숲’을 따라 산책로가 있고, 숲 정상에는 대한민국의 항구적인 평화를 염원하는 대형 태극기와 전망대가 있다. 기억의 숲이 품은 모양새를 한 평화 놀이터는 매 주말 가족 단위 방문객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한미간 우정의 역사, 한국전쟁 이후 67번의 추도식
오산죽미령 평화공원에는 전투를 기억하는 기념비가 2개 있다. 먼저 건립된 것을 구)유엔군 초전 기념비, 이후에 건립된 것을 신)유엔군 초전 기념비라 부르고 있다. 특히 유엔군초전기념비와 옛 동판, KSC안내판 근대문화유산 등 3점이 경기도 문화재 등록을 앞두고 있다. 이 기념비들은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하였던 굳건한 한미 우호관계를 상징한다 할 수 있다.
오산시는 지난 7월 1일 잊혀져 가는 전쟁의 아픔을 되새기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6.25전쟁 및 오산 죽미령전투 제71주년 기념 유엔군 미 스미스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을 개최했다.
곽상욱 오산시장은 “죽미령 평화공원은 전쟁의 참화를 넘어 상생이라는 더 높은 평화를 향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밝히며“남한과 북한, 미국의 정상들이 70년 전 최초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죽미령평화공원에서 다시 만나, 한국전쟁에서 UN군의 첫 격전지였던 이곳을 대화의 물꼬를 트는 화해와 협력의 장소로 탈바꿈 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말했다.
윤영은 경인본부 기자 ilyo03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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