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름’ 걸고 이 악물고 뛰었다
▲ 제15기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박문요 5단(왼쪽)이 콩지에 9단을 꺾고 생애 첫 세계기전 우승컵을 안았다. 사진출처=한국기원 |
이창호 9단이 흔들리고 있는 요즘, 콩지에 9단도 덩달아 흔들리고 있는 모습. 123수, 140수라는 수수가 말해 주듯 두 판 모두 세계 타이틀매치답지 않게 단명국이었다. 1국은 중반 넘어서까지 검토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질식할 것 같은 흐름. 피차 바둑판을 견고하게 다지며 두어나가 시쳇말로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양상이었는데, 패싸움 도중 박 5단, 아니 박 9단이 좌상귀 쪽에 팻감으로 쓴 수를 콩지에 9단이 받지 않았고, 그러자 귀에서 큰 수가 나 버렸다. 콩지에 9단이 귀의 사활을 착각한 것. 콩지에 9단은 잠시 자책하고는 돌을 거두었다.
2국은 초반에 박 9단이 점수를 올려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세 불리를 의식한 콩지에 9단이 하변 백진으로 돌격했으나 박 5단은 정확하고 강력한 대응으로 돌격부대를 섬멸, 항서를 받아냈다.
박 9단의 기풍은 원래 콘크리트류. 화려하거나 경묘한 맛은 없지만, 대신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 저력이 강점이다. 그 견고함에서는 일본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연상케 한다는 평을 듣는다. 물론 조금은 다르다.
고바야시 9단이 계속 조심조심 돌다리를 두드려 가면서 정확한 계가로 한 집 한 집 거두어들이는 바둑이라면 박 9단은 판 전체를 마치 돌 축대를 쌓듯이 구축한 후, 요새 속에서 적의 움직임을 추적하며 ‘선 방어, 후 공격’을 노리는 기풍. 이제 세계 타이틀 홀더가 되었으니 박 9단은 콘크리트류로 일가를 이룬 셈이다.
그에 비해 콩지에 9단은 이번 결승전에서 평소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검토실의 관전 감상이다. 활달한 행마와 전투력, 날카로운 수읽기로 최근 1~2년 사이 세계 랭킹1위를 구가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 본인도 자신의 급작스런 변조를 의식해 이번엔 작심하고 나선 느낌이었으나 그게 오히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원인이 된 것 같다는 얘기다. 1국은 상대의 사활을 착각해 자멸했고, 2국은 자신의 사활을 착각해 자멸했으니 명성에 어울리지 않은 조금은 부끄러운 패배였다.
중국 바둑에도 또 다시 지각 변동의 미묘한 낌새가 읽힌다. 구리 9단과 콩지에 9단, 이 쌍두마차가 삐거덕거리는 사이에 약 5년 전부터 꾸준히 쫓아오던 박문요 9단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박 9단은 아직도 ‘헝그리 복서’여서 그의 상승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도 있다.
박 9단은 1988년생. 흑룡강성 하얼빈 출신이다. 어린 시절은 넉넉하지 않았고, 어렸을 때 바둑을 배워 일찍 두각을 나타내긴 했으나 열두 살 때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어머니와 단 둘이 어렵게 살았다. 프로기사를 지망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아들의 바둑을 접지 않은 것은 “아들을 프로기사로 만들라”는 남편의 유언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흑룡강성, 불우했던 성장기, 두텁고 끈끈한 바둑, 그런 것들은 또 문화혁명의 혼돈 속에서 흑룡강성의 변방에서 돼지우리 당번으로 연명하면서 바둑의 꿈을 키우고 끝내 정상에 섰던 녜웨이핑 9단과도 닮았다.
하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건 녜웨이핑만이 아니다. 우리 조훈현 9단, 조치훈 9단, 서봉수 9단은 다 어렸을 때 어려웠다. 유창혁 9단도 그랬다. 이창호 9단을 시발로, 부모의 헌신적 뒷바라지로 대성하는 요즘 한·일의 신진 고수들과는 삶의 궤적이 좀 다른 셈이다. 헝그리 정신은 승부사의 롱런 여부를 예측하는 하나의 가늠자가 될 수 있다.
박 9단은 1999년 초단을 인정받았고, 2001년에는 국가소년단 바둑 팀에 들어가며 3단을 받았다. 2005년부터 열일곱 살 때부터 세계무대에 얼굴을 나타냈다. 등장하자마자 LG배에서 4강, 삼성화재배에서 16강에 진출, 스타덤에 올랐다. 2006년에는 삼성화재배 8강, 도요타-덴소배에서 16강에 들어갔고, 2007년에는 중국 초상은행배에서 우승, 중국 내에서 첫 타이틀을 차지하며 중국 랭킹 8위에 진입했다. 2008년에는 도요타-덴소배에서 준우승하고 잉창치배에서 8강, 정상에 바짝 다가섰다. 2009년 LG배 4강, 후지쓰배 8강, 2010년 다시 후지쓰배에서 4강, 아무튼 2005년 이후 박 9단은 매년 세계대회 입상권에 발을 걸쳐 놓고 있었던 것인데, 그게 올해 마침내 뜨거운 결실을 맺었다.
박 9단이 앞으로 중국 내에서도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 지금은 한·중·일의 국내 타이틀보다 세계 타이틀로 평가하는 시대지만, 아무튼 궁금하다. 조치훈이 일본의 ‘명인’을 쟁취, 정상을 정복한 것이 1980년, 스물네 살 때였다. 박문요는 올해 스물셋. 헝그리 정신을 지키라고 부탁하기는 미안한 말이지만 박문요의 중국 제패를 기대한다.
예전에 박문요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국내의 한 바둑 관계자가 정기적으로 후원한 일이 있었다. 그러다 박문요가 중국 내 갑조 리그 선수로 뽑혀 바둑으로 수입을 올리게 되자 박문요의 어머니가 후원자에게 이제는 우리 힘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면서 후원을 사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어머니의 정신이 강인, 강직하다. 강자 뒤에는 강한 어머니가 있는 것. 더구나 박문요는 우리 교포.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흑룡강인지, 헤룽강인지도 그렇고 하얼빈도 그렇다. 고구려에 대한 애틋한 감상(感傷), 아련한 향수를 자극한다. 그 자극이 싫지 않다.
박문요의 우승으로 LG배는 독특한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중·일뿐만 아니라 대만도 우승한 적이 있다는 것 외에 한 사람이 타이틀을 연패한 적이 없다는 것. 1회부터 14회까지 우승자는 이창호→왕리청→이창호→위빈→이창호→유창혁→이세돌→이창호→장쉬→구리→저우쥔쉰→이세돌→구리→콩지에다. 이창호만 네 번이고 이세돌과 구리가 각 두 번. 왕리청, 위빈, 장쉬, 특히 저우쥔쉰은 당시 우승후보가 아니면서 이변을 일으킨 주인공. 왕리청과 장쉬는 대만 출신으로 일본기원 소속이고 저우쥔쉰은 순수 대만. 순수 일본은 없는 셈이다.
네 번을 우승한 이창호 9단이 후배 박문요를 보며 미소 짓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