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의 ‘요염천사’ 지금 어디에…
세기말과 세기초의 에로 팬들에겐 잊지 못할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이규영. 6개월도 채 안 되는 활동 기간이었지만 그녀의 인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고 아직도 올드 팬들의 가슴 속엔 컬트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에로계의 심은하’로 불렸던 그녀를 추억한다.
한국 에로 비디오의 역사를 제작사 중심으로 정리한다면 그 시작엔 유호프로덕션과 한시네마타운이 있을 것이다. 먼저 시작한 유호프로덕션이 초기엔 우위를 차지했지만 한시네마타운이 진도희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하면서 몰고 온 ‘젖소 부인’ 열풍은 대단했고 이후 업계는 더욱 불타오른다.
한동안 양대 산맥 구도로 유지되던 업계에 파란이 일어난 건 세기말. 이강림 대표가 이끄는 씨네프로와 이승수 대표의 클릭엔터테인먼트는 에로계를 뒤집어 놓았다. 그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건 뉴페이스 없이는 새로운 에로는 있을 수 없다는 것. 씨네프로를 통해 유리와 유진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고, 클릭엔터테인먼트는 수많은 여배우들을 대방출한다.
그들 중 선두주자는 단연 이규영이었다. 정희빈, 조영원, 은빛, 박혜린, 이천년 등이 있었지만 이규영의 임팩트를 따라가진 못했다. 한때 명문대 철학과 출신으로 ‘허위 광고’되며 저널에 오르내렸던 그녀는 어디 출신이든 간에 이전의 에로 여배우들이 지니지 못했던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에로 배우 같지 않았다. 아니, 이건 사실 그녀만의 덕목은 아니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들은 모두 ‘안티 글래머’였고 청순함과 소녀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절정은 이규영이었고 ‘에로계의 심은하’라는 닉네임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날 수 있었던 작품은 <불타는 해석남녀>(1999)였다. 순결을 주었던 남자를 잊지 못하는 그녀의 신파적 캐릭터는 이후 <미친 밤>(1999)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킬러와 사랑에 빠지는 음대생으로 등장하는 그녀는 역시 그에게 순결을 바친다. 이후 <쏘빠때>(1999)와 <바람꽃>(1999)이 이어졌고 <이천년>(2000)을 마지막으로 총 다섯 작품만을 남긴 채 그녀는 에로 팬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첫 작품에선 다소 어설픈 모습으로 청순 가련 캐릭터를 맡았지만 이규영의 에로 파워는 <미친 밤>부터 본격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특히 이 영화에서 그녀는 놀라운 아웃도어 섹스 신 두 장면을 해낸다. 대낮의 육교 위에서 대담한 섹스 신을 보여준 그녀는 심야의 백화점 쇼윈도 앞에서 더욱 대담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 장면은 여러 명의 스태프들이 검은 천으로 둘러싸고 촬영했다는 후문.
이후 이규영의 캐릭터는 점점 도발적으로 변했다. ‘쏘세지가 빠다를 만났을 때’를 줄인 야릇한 제목의 <쏘빠때>에서 그녀는 친구의 남편에게 적극적인 육탄 공세를 펼치고, <바람꽃>에선 세 남자와 섹스를 즐긴다. 그리고 <이천년>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자 가장 무르익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봉만대 감독의 과격한 카메라 워크는 이규영을 더욱 에로틱하게 담아냈고 초기작에선 한두 가지 체위나 샤워 신 정도를 보여주던 그녀는 후배위를 거쳐 여성 상위까지 소화한 다.
이규영이 에로 팬들에게 가장 크게 어필했던 지점은 ‘판타지’였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다소 통통한 몸에 16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아담한 키, 어려 보이지만 왠지 모를 요염함이 깃든 마스크와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느낌. 그녀의 모습은 전형적이며 이상적인 ‘귀여운 여자친구’ 이미지였고 여기에 파격적 장소와 콘셉트의 섹스 신이 결합했을 때 그 시너지 효과는 대단했다. 특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욕조 안에서의 마스터베이션 장면은 이규영의 트레이드마크로서 판타지를 더욱 자극했다. 그 극치는 <바람꽃>의 웨딩드레스 섹스 신. 이규영의 팬이라면 절대 잊지 못할 명장면이다.
한 달에 한 작품씩 5개월 동안 다섯 편의 출연작을 남긴 그녀는 <이천년>을 끝으로 짧지만 굵었던 필모그래피를 마감한다. 이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완벽한 ‘에로 전설’이 된 이규영. 이후 그녀의 계보를 이은 배우는 하소연이었고, 하소연을 마지막으로 한국 AV의 화양연화는 조용히 저물어갔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