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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회장(왼쪽), 최태원 회장 | ||
삼성과 SK는 예전 유공(현 SK주식회사) 인수 때부터 경쟁과 갈등을 빚었고 지난해 SK사태가 터진 이후에는 양쪽의 긴장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기도 했다. 올해에도 지난 7월까지만 해도 양사는 SK의 휴대전화 사업 진출을 놓고 삼성쪽에선 통신서비스업자의 휴대전화제조를 금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SK는 휴대전화 제조사 인수전에 뛰어드는 등 전면전으로 치닫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난 8일 삼성전자가 2천5백억원 규모의 사모펀드를 설정한 뒤 1차로 1천1백74억원을 투입해 소버린의 경영권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SK(주)의 주식을 사들였다. 시장에선 이를 삼성이 SK의 백기사로 나선 것이라고 받아들였고, 삼성에서도 사실상 시인했다.
사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재벌들이 외국 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시달리면서 경영권 보호를 정부 당국에 요구해왔지만 최근처럼 한목소리를 낸 적은 없었다. 말하자면 삼성의 SK 백기사 노릇은 이런 흐름의 결정판이라고 평가받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삼성에 앞서 SK의 계열사인 SK텔레콤에 단말기를 납품하는 팬택앤큐리텔이 이사회 결의를 통해 SK(주)의 지분 1% 정도를 사기도 했다. 물론 백기사 역할이었다. 이어 삼성이 나선 것.
삼성의 발표 이전에 시장 일각에서 ‘팬택의 예에서 보듯 국내 단말기 제조업체들이 백기사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SK 주변에서도 SK(주) 협력업체와 납품업체, 연고도시의 지역 상공인들이 SK의 백기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경영권 방어에 나선 SK의 수뇌부에서도 지난 11월 소버린이 도발적으로 임시주총을 요구한 이후 수많은 도상연습을 거쳐 원군과 우군, 적군을 가리며 우호세력 확보를 위해 머리를 짜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삼성이 주식 매입을 통해 SK를 도울 것이라는 것을 SK 고위층에서는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앙앙불락하던 두 회사가 언제 손을 잡은 것일까.
재계에선 지난 7월 이기태 삼성전자 사장과 김신배 SK텔레콤 사장의 베이징 회동에서부터 양사의 새로운 협력 시대가 열린 게 아니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난 여름 SK텔레콤은 휴대폰 제조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관련회사의 인수합병 양해각서를 맺는 수준까지 얘기를 진전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해 국내 단말기 시장의 최대 공급업체인 삼성전자는 새 제품을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업자인 SK텔레콤에 먼저 납품한다는 관례를 깨고 지난 7월 당시로는 최초로 나온 2백만 화소폰과 3백만 화소폰을 KTF에 먼저 공급하는 등 신기종 단말기 공급 제한을 통해 SK 견제에 나섰다.
이 둘의 싸움은 정기국회에서 통신사업자의 휴대폰 제조 금지 법안 입안으로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예상을 낳기도 했지만 의외로 조용히 넘어갔다. 정기국회가 열리기 직전, SK에서 국내 이동통신 단말기 제조업체 인수합병을 백지화하는 결정을 내렸다.
정기국회가 열린 뒤에도 삼성쪽에선 통신사업자의 단말기 제조 겸업 금지 법안 상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예상외로 SK에서도 별다른 방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10월부터 삼성에서 만든 세계 최초의 5백만 화소폰이 SK텔레콤에 먼저 납품되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이 결국은 지난 7월20일 중국 베이징에서 있은 이기태 삼성전자 사장과 김신배 SK텔레콤 사장 회동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다. 그 자리에서부터 삼성과 SK간에 ‘상호 주고받기’에 대한 틀이 섰다는 것.
실제로 지난 10월14일 삼성그룹의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열린 이건희 회장 초청 전경련 회장단 저녁 모임에 최태원 SK(주) 회장이 처음으로 SK그룹을 대표해 참석했다. 그 자리는 지난해 영어의 몸이었던 최 회장이 대외활동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이 모임에 대해 삼성 출신인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이 회장이나 전경련에서 공식적으로 최 회장을 초청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참석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전경련의 상근 부회장인 현 부회장이 그날 모임의 코디네이터였음은 물론이다.
결국 이건희 회장 초청이라는 명분 아래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 최 회장이 ‘막둥이’로 참석해 대외 활동 시작 겸 재계 원로에 대한 인사라는 실리를 취한 모양이 된 것이다.
재계에선 삼성전자가 2천5백억원대의 여유자금을 SK(주)의 주식매입에 사용, 결과적으로 SK의 경영권 방어를 도와주는 ‘행위’가 그룹 고위층의 결정없이 이뤄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사장급 임원이 회동이나 총수들의 만남 등 양측 고위층의 우호적인 분위기가 사전 정지작업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인 것.
SK 주변에서도 이번에 삼성이 나선 과정에 대해 여러 루트를 통해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명관 부회장의 역할로 인해 ‘삼경련’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전경련에서도 지난 10일 외국자본 폐해 분석보고서를 발행해 외국자본의 적대적 M&A 방어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SK사태에 대해 재계가 공동전선을 펴야 한다는 명분을 세운 셈이다.
재계에선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에버랜드의 금융지주회사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삼성에서도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제약하는 정부의 입법안에 대해 ‘유감이 많다’는 점도 삼성의 이번 SK 지원의 뒷배경으로 풀이하고 있는 분위기다. 삼성에서도 이재용 상무의 3세 경영권 승계를 위해 ‘사전 정지작업’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것.
때문에 이번 삼성의 주식 매입이 단순히 삼성전자가 단말기를 납품하는 SK텔레콤의 모회사를 지원해 영업권을 보호하는 측면에서 주식매입을 했다고는 보기 힘든 것이다.
SK그룹에선 삼성의 이번 사모펀드를 이용한 SK 주식 매입이 이사회 결의사항이 아니었음에도 삼성쪽에서 ‘백기사 역할이 아니다’라는 형식을 통해 삼성의 SK지원을 간접적으로 공식화하는 모양새를 취하자 적잖이 당황했다는 후문도 있다.
중국 내 사업강화를 하고 있는 SK에선 ‘SK’ 브랜드로 중국에서 휴대전화 제조사업을 본격화할 움직임이지만 국내에서 SK(주)의 경영권 분쟁으로 뜻하지 않게 발목이 잡힐 수도 있는 것이다.
삼성과 SK의 ‘오월동주시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