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 향한 알 수 없는 신뢰감이 ‘모가디슈’로 이끌어…“오래된 커피 애호가, ‘민초’는 싫어요”
“림 대사는 설정 자체가 한신성 대사(김윤석 분)보다 20년이나 먼저 ‘아프리카 통’으로 외교를 했던 사람이고, 북한 체제에서 나와서 외국 문물을 많이 접하다 보니 사고가 유연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저도 1970~1980년대에 대통령이나 정부 이야기를 할 수 없던 시기에 정말 운이 좋아서 여권을 빨리 만들 수 있었고, 빨리 외국에 나갈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 제 또래보다 (사고가) 트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일본도 빨리 가고, 미국·동남아도 제가 빨리 갔었는데 그때 틀 안에서만 가지고 있던 제 생각들이 다 깨졌던 거죠. 그런 게 저한테는 연기 표현을 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었어요.”
1991년 소말리아 내전을 배경으로 하는 ‘모가디슈’ 속 허준호가 맡은 북한 대사 림용수는 그의 말마따나 20년 동안 불모지 같은 아프리카 대륙을 누비며 외교 기반을 쌓은 인물이다. 그 우위 속 노련미를 바탕으로 남한의 소말리아 외교를 사사건건 방해하며 체제에 충성하는 한편으로는 북한의 젊은 세대들보다 훨씬 유연하고 개방적인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내전 발생으로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모두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망설임 없이 남한 대사관과 바로 손을 잡는 모습으로 그의 유연한 사고를 알 수 있다. 오히려 그의 막내아들 뻘인 북한의 태준기 참사관(구교환 분)이 훨씬 체제에 절여져 있는 모습으로 뚜렷한 대비감을 만들어 낸다.
배우의 절제된 연기 톤과 맞물린 완벽한 ‘북한 말’ 대사도 ‘모가디슈’의 또 다른 관람 포인트다. 관객들에겐 다소 생소하게도 이들의 북한 말은, 알아듣기에 아주 난해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어와 아랍어 대사와 마찬가지로 자막 처리돼 있다. 류승완 감독은 이에 대해 “북한을 통일의 대상으로 생각하던 기성세대들과 달리 완전한 외국, 타국으로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의 시각을 자막으로 담고자 했다”는 취지를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대사를 자막으로 본 장본인의 입장은 어땠을까. 허준호는 “저는 자막이라 더 좋았다”며 웃어보였다.
“북한 사람들의 대사 뿐 아니라 외국인 캐릭터들이 대사할 때도 보면 만화처럼 대사가 얼굴 옆에 나오잖아요? 사람의 표정을 보면서 동시에 자막도 같이 읽을 수 있는 게 저는 되게 재밌었어요(웃음). 사실 연기적으로 보면 북한 말을 할 때 그분들의 삶에서 묻어 나오는 문화적인 표현과 ‘음’ 이라는 짧은 말 한 마디에도 알 수 있는 그 생활적인 톤들을 짧은 시간 안에 녹음하려니 아무리 흉내 내려 해도 안 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과연 이 대사가 관객들에게 전달이 잘 될까’ 하는 의심도 있었는데, 자막이 있어서 저는 도리어 좋게 봤습니다.”
여기서 허준호가 ‘모가디슈’를 선택하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류승완 감독은 대체, 어떻게 허준호를 홀렸던 걸까. “만나자고 하기에 생각 없이 가볍게 나갔는데 (출연을) 결정했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린 허준호는 류승완 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직접적으로 작품 이야기를 한 것은 초반 아주 잠깐 동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짧게 언급된 작품 속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들어가 있고, 이렇게 홍보 자리에까지 나오게 된 것이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라는 것.
“만나자는 자리에 나갔더니 소말리아 내전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도 ‘아, 1990년대쯤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했죠. 그런데 그때 남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같이 나왔단 얘긴 처음 들었어요. 듣다 보니까 ‘어 재밌네’ 생각했고(웃음), 거기에 북한 대사 역이면 역할이 크겠는데 싶었죠. 그런 다음에 나온 대화들은 그냥 다 옛날 추억 얘기, 영화 준비 얘기, 스토리를 어떻게 펼쳐나가겠다는 소개나 준비 과정 뭐 그런 거였는데 저도 사실 무슨 대화에서 제가 출연 결정의 계기를 얻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웃음). 뭔가 그 자리에서 바로 류승완에 대한 믿음이 생겼던 것 같긴 한데, 그냥 ‘하면 괜찮겠다’ 이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촬영 장소인 모로코에 서있었다. 4개월 동안 100% 올 로케이션으로 진행된 ‘모가디슈’는 그 기간 동안 배우들이 끈끈한 정을 나눈 것으로도 유명했다. 모든 배우들이 모로코 현장을 가리켜 “제2의 고향 같다” “그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 같다”며 그리워할 정도였다. 허준호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스마트폰 갤러리 안에는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로 가득했다.
“현장은 보는 재미가 있었어요. 아무래도 좋은 배우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저희 모로코 세트장을 제가 찍은 사진도 많아요. 제가 원래 셀카를 잘 안 찍는 편이라 풍경 사진들인데 제가 아주 요만하게 나오는 식으로(웃음). 아, 인스타그램에 왜 안 올리냐고요? 저도 할 수 있을 땐 SNS를 해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팬데믹이라 일부러 더 안 하는 것도 있죠. 많은 분들이 힘드신데 조용히 있어야지(웃음).”
현장에서는 ‘바리스타 허’의 카페도 인기였다. 인터뷰 당일에도 아침부터 줄곧 커피를 마셨다며 ‘커피 애호가’로서의 면모를 당당히 밝힌 허준호가 끓이는 커피 맛을 보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누군가가 커피를 얻어 마셨다고 자랑하면, 이에 질세라 다음 날엔 또 다른 누군가가 오는 식이었다.
“해외 촬영에 나갔을 때 보통 2~3주 지나면 (다들) 여지없이 향수병에 늘 걸리게 돼요. 그렇게 되기 전에 모두들 같이 잘 어울리고, 대화도 많이 하고 서로 이해해줄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같이 차 한 잔 놓고 얘기할 수 있도록 차를 대접하자’ 이렇게 된 거죠. 사실 원래는 제가 커피를 좋아하니까 혼자 내려 먹다가 누가 오면 한 잔씩 주고 그랬는데, (커피를) 받은 사람들을 보고 못 받은 사람들이 받고 싶어 하고 그러니까 ‘이럴 바엔 그냥 전체 다 주자’ 이런 식으로(웃음).”
이처럼 현장의 모두가 훈훈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고 있을 때 유독 허준호의 마음에 들어온 이가 있었다. 극 중 림용수 대사를 보필하는 북한 대사관 소속 태준기 참사관 역의 구교환이었다. 한국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한 카 레이싱 신을 찍어야 하는데, 촬영을 위해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서야 면허를 딴 바로 그 인물. 그 차에 타야만 했던 허준호는 공포심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써야 했다.
“차 탈 때마다 ‘내가 운전하면 안 되냐’ 졸랐었죠(웃음). 첫날 촬영은 교환이가 정말 잘 해내서 안심이 되긴 했지만 사실 공포에 떨고 있었어요. 무서운 걸 어떡해(웃음). 사실 제가 해외 촬영에서 사고가 안 난 적이 없어서 그런 트라우마 같은 게 있어요. 거기에 애가 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됐다는 소리를 듣고 공포에 떨었었는데(웃음), 교환이가 너무 잘 해내 줬죠. 교환이가 표현을 ‘모로코에 내 차를 놓고 온 것 같다’는 표현을 하잖아요. 그 정도로 정말 열심히, 잘 해줬어요.”
물기가 살짝 모자란 붓으로 강하게 긁어내린 것 같은, 거친 수묵화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과 달리 허준호는 그와 함께 했던 주변 사람들로부터 늘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처럼 강렬한 모습 뒤에 숨겨진 다정함이 팬들로 하여금 그를 꾸준히 사랑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아닐까. 작지만 탄탄하다는 허준호의 팬덤은 이번 ‘모가디슈’ 때에도 그를 응원하는 목소리를 높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다음 작품에서도 응원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면 팬덤에게 어디에도 없는 자그마한 콩알 정보를 하나 건네려고 한다. 허준호는 ‘반 민트초코’ 파라고.
“저는 사실 강한 캐릭터도, 옆집 아저씨 같은 다정한 캐릭터도 다 좋아요. 제가 워낙 강한 걸 많이 해서 그게 익숙하신 것 같은데, 이전에도 장판석(OCN 드라마 ‘미씽: 그들이 있었다’ 속 등장인물) 같은 캐릭터는 좀 했어요(웃음). 운이 좋게도 계속 번갈아가면서 기회가 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왔다갔다할 수 있는 게 저로서는 좋더라고요. 또 제 연기를 좋게 봐 주시는 팬 분들에게도 항시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겠어요. 요번에 손 선풍기와 화보집도 선물로 보내주시고, 꽃도 보내주시고 너무 감사했어요. 그분들께 제가 보답할 것은 더 열심히 하고, 더 잘하는 것뿐인 것 같아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