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골보다 너희 골이 천만 배 좋다~”
▲ ‘아시아의 독수리’가 FC서울의 벤치에 내려앉았다. 최용수 감독대행은 특유의 ‘난동 세리머니’로 선수들에게 기를 팍팍 불어넣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참으로 기분이 묘했다. 선수 시절부터 질긴(?) 인연을 맺었던 그를 지금은 지도자의 신분으로 다시 만난다는 게 당시의 추억들과 함께 색다른 기분을 갖게 했다. 98프랑스월드컵 예선 때 잠적해 있던 그를 타워호텔에서 찾아내 인터뷰했던 기억,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스포츠 스타로 우뚝 섰던 장면들,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주전이 아닌 후보로 벤치에서만 경기를 지켜봤던 모습들…. 최용수란 이름에 다양한 그림들이 오버랩되면서 그의 축구 스토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런 걸 ‘감회가 새롭다’라고 표현하나보다. 선수 시절의 많은 부분을 봤고, 알았고, 기억으로 남은 사람과 이젠 지도자로 대면한다는 게 설렘과 흥분을 안겨준다.
▲돌이켜보면 내 능력에 안 맞는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다. IMF 시절, 축구를 통해 그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드리고 싶었고, 그 과정 속에서 나 또한 많은 성장을 이뤘다. 중간 중간 힘든 일도 있었고, 한없이 작고 위축된 경험도 해봤지만, 그래도 축구선수 최용수는 행복했다. 이렇게 오랜 인연을 맺은 기자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나.
―기자 생활하면서 월드컵을 4번 경험했다. 그중에서 최용수 감독대행과 함께한 월드컵이 두 번이었다.
▲98프랑스월드컵 때만 해도 최용수 하면 아시아의 호랑이였다. 그러나 실제 월드컵에 나가보니 종이 호랑이더라. 심리적인 부담감에 내가 갖고 있는 경기력을 다 끄집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월드컵을 얘기하다보면 자연스레 차범근 감독님이 거론된다. 그러나 최용수란 선수가 아시아에서 이름을 날린 데에는 차 감독님이 날 이끌어내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멕시코전에 선발 출전시키지 않은 문제로 불화설이 나돌기도 했는데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2002월드컵 때는 한국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올리는 현장에 있었지만 벤치에만 머물렀다. 마음이 아프지 않았나.
▲ 지난 5월 8일 상주 상무와 FC서울전에서 결승골이 터지자 최용수 감독대행이 선수들을 끌어안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FC서울 |
―당시 선수로 뛰었던 황선홍, 홍명보는 지금 감독으로 맹활약 중이고, 대표팀 막내였던 박지성은 이미 대표팀에서 은퇴를 한 상황이다. 격세지감을 느낄 것만 같다.
▲정말 재미있어 보이지 않나. 특히 올림픽대표팀을 이끄는 명보 형과는 지도자로 맞붙을 일이 없지만 선홍이 형과는 K리그에서 벤치 대결을 벌이는 상황이라 긴장감이 대단하다. 박지성은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세대교체의 한 축으로 성장한 스타였기 때문에 언젠가 한국 축구에 박지성의 시대가 오리라고 예상했었다. 가끔 TV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을 볼 때마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선배로서 부끄러운 기분도 든다.
―황보관 전 감독이 시즌 도중 물러난 후 어려운 시기에 팀을 맡은 탓에 걱정이 많았을 것 같다. 혹시 감독대행 제의를 피하고 싶진 않았나.
▲내가 잃을 게 없는데 피할 게 뭐가 있겠나. 그게 젊음이고 내 캐릭터 아닌가. 내가 만약 프랑스월드컵에서 골을 많이 넣고, 프리미어리그 웨스트햄에 진출했더라면 지금의 최용수가 있을까? 아마도 단명했거나 지도자 생활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시련의 시간들이 존재했고, 겪어냈기 때문에 힘든 시기에 FC서울을 맡은 데 대해 두려움이 없었다.
―1999년 소문대로 웨스트햄에 진출했더라면 ‘프리미어리거 1호’가 될 뻔 했다. 결국엔 2001년 J리그 제프 이치하라에 입단하게 됐다. 5년간 J리그에서 활약하며 142경기에 출전, 86골을 쏘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는데, 일본 생활 초기에 힘든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입단 초반엔 선수들이 나한테 공을 패스해 주지 않았다. 출근해서 클럽하우스에 가보면 열여덟 살 되는 선수가 내 눈만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인사조차 안 하더라. 나중에서야 선수들이 날 ‘왕따’시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무렵 주위에선 ‘최용수가 일본에서 1년도 못 버티고 한국으로 유턴할 것이다’란 소문이 나돌았다. 슬며시 오기가 생기더라. 선수들이 나한테 패스를 할 수밖에 없게끔 경기력을 끌어올리려고 연습에 연습을 반복했다.
―그런 선수들과 가깝게 된 계기가 있었나.
▲이런 해프닝이 있었다. 선수단 회식이 7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가서 최대한 쫙 빼 입고 6시 30분에 도착해서 선수들을 기다렸다. 선수들한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나름 신경써서 옷을 입었는데 7시에 도착하는 선수들 옷차림을 보니까 반바지에다 슬리퍼를 신고 러닝셔츠만 입고 오는 게 아닌가. 나만 튀었고 나만 우스운 존재가 돼버렸다. 그런데 그 일 이후로 선수들과 조금씩 거리감을 좁히기 시작했다. 골이 터지면서 선수들이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제프 이치하라에서 있었던 3년 동안은 내가 대장 노릇하며 지냈다.
―지금은 진짜 ‘대장’이 되었다. 얼마 안 됐지만, 감독대행의 타이틀을 안고 K리그 사령탑에 오르면서 이런저런 화제를 많이 양산했다. 특히 선수들이 골을 성공시켰을 때 골 넣은 선수보다 더 좋아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일부에선 ‘최용수의 난동’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하하. 아직 내가 감독으로선 나이가 어린 편이라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정도다. 그리고 솔직히 벤치에 있다보니 내가 골 넣은 것보다 선수들이 골을 성공시키는 게 훨씬 더 기분이 좋다. (고)명진이가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ACL 16강전에서 골을 집어 넣고 ‘광고판 세리머니’를 보여줬더라. 나중에 비디오로 다시 보니까 내가 했던 것보단 ‘순도’가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웃음).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만큼은 무장해제되길 바란다. 선수가 즐거워야 경기를 보는 관중들도 즐겁지 않겠나(최용수는 1997년 벌어진 98프랑스월드컵 예선 카자흐스탄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후 광고판에 올라가 세리머니를 펼치다 떨어져서 넘어진 적이 있었다).
―지도자 생활하면서 가장 고민스런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질 높은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선수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훈련장에 나올 수 있을까. 경기에 뛰지 못한 선수들도 위축되지 않고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그들의 장점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K리그의 명문 클럽인 FC서울을 좀 더 발전시키고, 아시아챔피언스리그의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부분들이다. 감독은 참아주는 직업인 것 같다. 그래서 기다림을 배우는 것 같다. 세뇰 귀네슈 감독을 보좌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코치 생활 6년 동안 능력 있는 감독님들을 만나 현장을 배운 부분이 나한테는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K리그 6강 플레이오프에 오를 팀을 예상해 달라고 주문했다. 한참을 고민하며 답변을 주저하던 그가 결국엔 이렇게 입을 연다.
“FC서울은 당연히 들어가고, 제주, 포항, 전북, 그리고, 와 이거 어렵네요. 모든 감독님들과 인연이 있기 때문에 누군 집어 넣고 누군 빼고 그러면 당장 전화하셔서 뭐라고 하실 텐데…. 울산을 넣고 대구를 빼면 이영진 감독이 삐치실 것이고…. 그냥 박빙이라고 쓰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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