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개월 동안 100경기 조작됐다”
“공은 둥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역전 우승을 거두었던 제프 헤어베르거 전 서독 감독이 남긴 명언이다.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사람들은 어느 팀이 이길지 모르기 때문에 경기장에 간다.” 이처럼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기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리얼리티 100%’가 생명인 스포츠 경기가 만일 조작된 것이라면 어떨까. 특정팀에게 유리하도록 불리한 판정을 내리거나 혹은 선수가 일부러 실수를 하는 식으로 교묘하게 승부를 조작한다면 말이다.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의 충격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국내 K리그에 불어 닥친 승부조작 스캔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세계 최고의 명문클럽들이 즐비한 유럽축구리그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잊을 만하면 터지는 승부조작 스캔들로 홍역을 앓고 있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유럽프로축구의 대형 승부조작 스캔들을 살펴봤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약팀이 어느 날 갑자기 강팀을 이긴다고 가정해보자.
축구공은 둥글기 때문에 물론 이변이란 것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간혹 경기 진행 방식이나 과정이 매끄럽지 못해 의심을 사는 경우도 있다.
지난 2004년 독일 분데스리가의 몇몇 경기가 그랬다. 3부 리그의 약팀 SC 파더본과 1부 리그의 강팀 함부르크 SV의 독일컵 예선전. 결과는 놀라웠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파더본이 4 대 2로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이날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경기 결과보다 더욱 불만인 것이 하나 있었다. 심판이 이상하리만치 편파 판정을 했던 것이다. 얼마 후 독일축구연맹의 의뢰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그날 심판을 맡았던 호이처는 결국 승부조작 사실을 시인했고, 마침내 축구 리그와 뒤얽혀 있는 불법도박 조직의 방대한 네트워크가 세상에 공개됐다.
호이처 심판을 매수한 일당은 크로아티아의 마피아 조직원인 사피나 형제였다. 1부 리그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이 적고 보다 안전한 2부와 3부 리그를 타깃으로 삼았던 사피나 형제는 호이처 심판에게 총 5만 유로(약 7700만 원)를 지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듬해 1월 검찰에 기소된 호이처 심판은 징역 29개월을 선고받고 축구계에서 영구 퇴출당했으며, 사피나 형제 역시 징역 35개월을 선고받고 베를린 구치소에 수감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독일은 물론 유럽 축구계가 발칵 뒤집혔던 것은 물론이었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승부조작 스캔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축구연맹(UEFA)은 베팅업체와 불법도박사이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고, 배당률이 의심스러우면 즉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이런 취지에서 얼마 전 FIFA는 인터폴에 10년 간 2000만 유로(약 310억 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승부조작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단속을 강화해도 이미 뿌리가 깊을 대로 깊은 승부조작은 쉽게 근절되지 않고 있다. 되레 수법은 날로 정교해지고 있으며 독일을 비롯해 이탈리아, 브라질, 터키, 동유럽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실정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지난 5개월간 유럽 24개국이 승부조작에 영향을 받았으며, 최대 100경기가 조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승부조작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부를 조작하는 가장 손쉽고 흔한 방법은 심판을 매수하는 것이었다. 심판은 경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뿐더러 경제적으로 선수들보다 궁핍하기 때문에 도박사들의 주된 타깃이 되어 왔다. 또한 구단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있는 선수들보다 접근하기 쉽다는 점도 작용했다.
하지만 2005년 ‘호이처 스캔들’로 인해 사정은 달라졌다. 각국의 축구연맹들이 심판을 엄격하게 단속하기 시작하자 이제 타깃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다름이 아니라 선수 개개인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피나 형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구치소에서 복역하던 중 12개월로 감형을 받고 조기 출소한 이들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겠다. 과거의 잘못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라고 말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는 악어의 눈물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란 듯이 다시 승부조작을 일삼은 형제는 이번에는 보다 은밀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심판 대신 선수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이들은 한 명만 매수하기도 했지만 서너 명을 같이 매수해서 ‘팀’을 이루는 방식도 사용했다. 이렇게 하면 훨씬 자연스럽게 경기를 하게 되고 또 그만큼 의심을 받을 확률도 적어진다는 계산에서였다. 또한 모두가 공범자이기 때문에 범죄 사실이 외부로 누설될 위험도 줄어들었다.
선수들 가운데 주된 포섭 대상은 2, 3부 리그에서 뛰는 노장 선수들이었으며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골키퍼가 가장 많았다. 은퇴를 앞둔 선수들은 대개 부양가족이 있어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또 인맥이 넓다는 점에서 두루 유용했다. 뇌물의 액수는 경기의 중요도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으며, 보통 한 경기당 최소 500유로(약 78만 원) 이상은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2009년 사피나 형제는 다시 독일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이번에는 스케일이 더 컸다. 독일뿐만이 아니라 이웃나라인 오스트리아, 스위스, 터키, 벨기에,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9개국에서 총 200여 경기가 조작된 사상 최대 규모의 스캔들이 터지고 만 것이다. 여기에는 심지어 챔피언스리그 예선 세 경기와 유로파리그 예선 12경기까지도 관련되어 있었으며, 21세이하유럽선수권대회 한 경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피나 형제는 심판, 선수, 감독, 구단 관계자 등 100~200여 명을 닥치는 대로 매수했으며, 이를 통해 최소 1000만 유로(약 190억 원)를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승부조작 스캔들하면 이탈리아를 빼놓을 수 없다. 축구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로 기록된 ‘칼치오폴리’ 스캔들이 대표적이다. 도청, 불법 만남, 불법 감금까지 자행됐던 이 사건에는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구단으로 꼽히는 유벤투스와 AC밀란 등이 연루되어 더욱 충격을 안겨줬다.
사건의 발단은 루치아노 모지 유벤투스 전 단장의 통화 내용이 검찰에 의해 도청당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선수들의 도핑 혐의를 수사하기 위해서 전화를 도청하던 검찰은 뜻밖의 통화 내용에 놀랐다. 모지가 UEFA 심판위원회 부회장에게 유벤투스에 호의적인 심판을 배정해줄 것을 청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12년 동안 유벤투스 단장을 역임했고,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일종의 ‘대부’로 알려졌던 모지의 청탁을 거절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 결국 모지는 심판 배정에 관여하는 식으로 경기에 개입할 수 있었으며, 검찰 수사 결과 2004-2005 시즌 38경기 가운데 29경기에 관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이와 더불어 유벤투스가 레지나에게 1 대 2로 패하자 경기 직후 해당 심판을 탈의실에 가두었던 혐의도 드러났다. 당시 모지는 유벤투스에게 유리하게 경기를 진행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판을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유벤투스에서 시작된 이 스캔들은 곧 AC밀란, 라치오, 피오렌티나 등 11개 팀으로까지 번졌으며, 2년간 경기장 곳곳에서 승부조작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유벤투스는 2005년과 2006년의 세리에 A 챔피언 자격을 모두 박탈당했으며, 승점 9점이 삭감되면서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스캔들의 핵심 인물이었던 모지는 5년간 자격을 정지당했다.
이밖에도 AC밀란은 승점 8점 삭감 및 지난 시즌 승점 30점을 삭감당했으며, 라치오와 피오렌티나 역시 각각 승점 3점과 15점을 삭감당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실 공방은 아직도 계속 진행 중이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지가 유벤투스만 가혹한 판정을 받았다며 법원에 항소하는 동시에 결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골드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음모 같은 건 없었다. 팀은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실력에 따라 이기고 질 뿐이다. 심판들도 사람이니깐 실수를 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모두가 결백하다는 것이다. 심판에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거는 것은 이탈리아 축구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심판을 배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모두에게 서로 전화를 건다”라고 주장했다. 말인즉슨 ‘칼치오폴리’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았던 다른 클럽들, 가령 인터나치오날레, 인터밀란, 볼로냐, 칼리아리, 팔레르모, 우디네세의 단장들 역시 수시로 심판과 통화를 하고 있고, 또 심판 배정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모지의 변호인단은 지난해 4월 법원에 각 구단주와 심판의 통화 내용을 담은 41개의 통화 기록을 증거물로 제출했고, 이에 따라 이 사건은 아직도 법원에서 심리 중에 있다.
‘우리만 억울하게 걸렸다’는 모지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2006년 홍역을 치렀던 이탈리아에서 최근 또 다시 승부조작 스캔들이 불거졌다. 2부리그(세리에 B)와 3부리그(세리에 C)에서 벌어진 이번 스캔들에 전·현직 선수들 16명이 연루돼 체포됐다. 의혹에 관련된 팀은 다음 시즌 세리에 A로 승격하는 아탈란타와 시에나 클럽. 충격적이게도 체포 대상에는 이탈리아 대표팀 스트라이커로 맹활약했던 주세페 시뇨리가 포함돼 있다.
이탈리아축구협회는 “아탈란타와 시에나 외에 다른 클럽들도 조사를 받고 있다”며 “현재 16명이 체포됐지만 승부조작 의혹으로 수사 대상에 오른 사람은 현역 선수를 포함한 26명에 달한다”고 밝혀 사태가 더 커질 수도 있음을 예고했다. 이탈리아 경찰은 전·현직 선수와 출판업자 등으로 구성된 범죄조직이 불법 베팅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 승부를 조작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터진 대형 승부조작 스캔들은 1980년대에도 있었다. 당시 ‘토토네로’ 스캔들이라고 불렸던 사건에는 AC밀란, 라치오, 볼로냐, 팔레르모, 페루자 등이 연루되어 있었으며, 마피아 조직에 의해 세리에 A와 B의 경기가 다수 조작되었다. 당시 사건으로 인해 AC밀란과 라치오가 각각 세리에 B로 강등되었으며, 당시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파올로 로시는 뇌물 수수 혐의로 3년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2년 후 스페인월드컵 출전을 위해서 형이 경감되었으며, 결국 월드컵에서 6골을 넣으면서 MVP로 뽑히는 기염을 토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