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29만 원 지존도 있는데, 뭘’
▲ 불법도박사이트로 벌어들인 100억대의 ‘금다발’이 나온 전북 김제시 금구면 선암리 마늘밭. 뉴시스 |
“이번에는 5년 정도 살다 나오지 않겠습니까. 선수끼리 빨리 처리합시다.”
2010년 5월 전국 공직자들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건 후 불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공갈 협박해 5000만 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김 아무개 씨(55). 그는 5년 전에도 동일한 방식의 범죄로 1억3000만 원에 달하는 부당이득을 벌어들였다. 출소 후 버젓이 같은 방식의 범죄를 저지른 그는 되레 빠른 수사를 촉구하며 경찰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김 씨 역시 경찰 측에서 부당이득의 규모와 향방에 대해 추궁했을 때 “도박이나 복권을 사는 데 다 탕진했다”고 주장했다. 추적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한 진술이지만 실제로 대부분 경우 대포통장을 만들어 현금화한 후 누군가에게 맡겨놓거나 소액씩 쪼개서 차명계좌에 은닉해 둔 경우가 많아 추적이 쉽지 않다고 한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김해경찰서 김한철 팀장은 “온라인사이트를 통해 명의를 빌려주고 대가로 10만 원을 받는 변종 알바까지 생겨 수사에 난항을 겪었었다”고 회고했다.
더욱이 피의자 김 씨는 “타 지역에서 사기를 저지르면 한 번도 걸린 적이 없었다. 앞으로 김해 지역은 피해서 작업(사기)을 해야겠다”며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유치장으로 향해 담당 경찰들이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부당이득을 금융권이 아닌 다른 곳에 숨겨놓을 시엔 본인이 털어놓지 않는 이상 몇 년 동안 발견되지 않는다. 지난달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10억 원이 든 ‘돈박스’ 사건 역시 불법 스포츠 도박사이트 운영자 김 아무개 씨(32)의 소유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김 씨가 박스를 맡겼을 당시의 CCTV화면과 지문 감식 결과 등을 근거를 돈 박스 주인이 김 씨임을 추정하고, 지난 2월 인도네시아로 출국했다 돌아오는 그를 공항에서 긴급체포했다. 김 씨 역시 이미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선 형량을 모두 채운 후 출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당시 수사과정에서 발각되지 않은 수십억 원 중 일부를 이 물류창고에 맡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융권이 아닌 보험회사를 통해 돈을 숨기는 신종수법도 성행하고 있다. 보험에 가입한 후 수차례에 나눠 입금하고 출소 후 가입을 해지해 한꺼번에 찾는 방식이다. 인천남부경찰서 박 아무개 형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보험회사는 금융감독원의 감시 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점을 이용해 경찰의 추적을 피하는 신종수법이 횡행하고 있다”며 “부당이득을 보험금으로 바꿔 놓으면 강제로 환수조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수사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피의자들이 도박으로 부당이득을 탕진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재판 과정에선 돌연 고가의 변호사를 선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조속히 처리하자고 경찰을 종용하다가도 형량을 낮출 수 있는 데까지 낮추기 위해 재판을 지연시키는 등 시간을 끄는 경우도 많다.
이와 관련 지난 10년 동안 지능범죄사건을 수사해 온 박 아무개 형사는 “작년에 한 연구자재 납품업체 업주가 사례비를 받는 명목으로 다수의 대학교수들과 짜고 ‘카드깡’ 방식으로 연구용역비를 과다 계상하는 것을 도와온 정황이 포착됐다. 경찰조사에서 이 피의자는 한 번에 다섯 명의 변호사를 선임한 후 나타났다. 변호사들은 조사 때마다 동행해 ‘압박수사다’ ‘이거 유도심문 아니냐’ 등 각종 법조항을 들어 따지는 통에 누가 누굴 조사하는지 모를 지경 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조사 때는 ‘빨리 끝내자’며 여유 있게 자신의 범죄를 시인한 피의자들이 막상 법정에선 깊이 뉘우치는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박 형사는 “재판정에서 피의자가 고의성이 적고 범죄 사실에 대해 반성하는 것처럼 비친다면 형량이 감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반성’이란 변수가 사기 사건에 있어서 형량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피의자들은 변호사 선임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수사 관계자들은 전했다.
지난해 7월 부산 가덕도에 살고 있는 주민 수백 명을 상대로 20억 원을 편취한 별정우체국장 심 아무개 씨(48)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피해 노인들은 심 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심 씨는 즉각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정작 피해 노인들은 소송을 진행할 여유 자금은 물론 변호사 선임료도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피해자들은 국가의 도움으로 국선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있었지만 심 씨가 계속해서 항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통에 소송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당시 기자와 만난 피해자 박 아무개 씨(48)는 피의자가 유치장에서 보낸 편지를 보여줬다. 편지에서 심 씨는 “어차피 싸움을 길게 끌어봤자 당신만 더 많은 돈을 쓰게 된다. 고소를 취하해주면 얼른 나가서 당신의 피해금액부터 돌려주겠으니 다른 피해자들도 나서서 설득해달라”며 으름장과 함께 후안무치한 부탁을 하고 있었다.
마늘밭 사건의 경우도 불법으로 벌어들인 도박자금이 100억 대를 넘었지만 피의자는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다. 당시 A 씨를 수사한 충청지청 사이버수사팀 관계자는 “수사 당시엔 A 씨 역시 부당이득의 은닉 여부에 대해 함구해 부당수익의 규모를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