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 줄고 ‘은따’ 늘어, 피해 인정 쉽지 않아 입증 과정 극단적 선택도…가해자 다수 “친해서 그랬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이 2주년을 앞두고 있지만, 피해 사례가 끊기긴커녕 더 교묘하게 변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문제를 제기한 뒤 사측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했고 일부는 피해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직장을 그만두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반면 가해자들은 “친해서 그랬다”는 변명을 내세우는 일이 많았다.
노동청이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단순히 피해 내용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이를 입증할 수 없기에 녹취록 등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한 까닭이다. 일요신문이 지난 6개월간의 서울시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이의 신청을 포함 총 64건의 안건 가운데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받아 시정권고 조치가 내려진 사건은 9건뿐이었다.
최근에는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잇따라 발생했다. 대전에서는 대전시청 도시주택국 소속 신입 공무원 A 씨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우울증을 앓다가 지난 9월 숨진 채 발견됐다. 발령 3개월 만이었다. 유족에 따르면 A 씨는 ‘1시간 일찍 출근해 상사가 마실 차와 커피 등을 준비하라’는 업무와 무관한 지시를 받았고 이를 거부하자 사내 따돌림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생전 지인들에게 따돌림으로 인한 심적 괴로움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이 사건은 대전시 감사관실에서 조사하기로 했으나 11월 2일 “참고인마다 증언이 다르고, 유족 측 주장과 사건 관계자들의 답변에 상반되는 부분이 많았다”며 “유족의 궁금증과 고인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폭넓은 권한을 가진 기관에 수사를 맡기기로 했다”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런가 하면 지자체로부터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을 받아도 실제 가해자 징계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지난 4월 16일 서울시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는 서울디자인재단 본부장 B 씨의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고 시정권고 조치를 내렸다. 위원회에 따르면 B 씨는 지난해 말 같은 본부의 부하직원 C 씨의 손목 부분을 발로 차는 등의 행위를 했다.
서울시의 시정권고 이후엔 외부감사가 진행됐다. 지난 8월 2일부터 23일까지 이어진 감사에서는 서울시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 결정문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시정권고 이행 여부를 점검했다. 여기서도 B 씨의 행위는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감사위원들은 B 씨에 대한 인사 조치와 필요 시 후속절차로 C 씨의 심리치료를 진행하라고 요구했다. 최소 두 차례 이상 직장 내 괴롭힘 인정을 받은 것이다.
C 씨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업무 관련 대화를 하는 와중에 손목을 채였다. ‘불쾌하다’는 의사표시를 했음에도 이후로도 비슷한 행위가 반복돼 신고를 결심하게 됐다. 현재는 가해자에 대한 사측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다만 서울디자인재단 측은 아직까지 가해자에 대한 인사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재단 관계자는 “인사위원회를 열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처리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물리적 폭행·폭언이 줄어든 대신 ‘은따(은근한 따돌림)’도 크게 늘었다. ‘은따’를 경험한 이후 퇴사를 했다는 피해자 D 씨는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은따를 당했다. 사내 직원들이 있는 단체 카카오톡 방에 초대되지 못했고, 식사도 따로 했다. 연봉이나 진급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직접적으로 지시를 받지는 않았지만 정규직 직원들이 먹고 남은 음식물을 버리거나 그릇을 치우는 것도 내 몫이었다. ‘회사원으로서 나’는 존재하긴 하지만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며 “하루 24시간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에서 이런 취급을 받으니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D 씨는 “더 무서운 점은 그렇게 몇 년 지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계급으로 나누고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변해가는 내 자신이 무서워 회사를 그만둔 뒤 심리치료를 받았다. 억울한 마음엔 노무사에게 상담도 받아봤으나, 은따는 물리적 폭행이나 욕설과 달리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미 퇴사한 이후라 마땅한 구제책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이지만 가해자들은 되레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내세우는 변명은 ‘친해서 그랬다’이다. 서울시 마포구의 한 노무법인 관계자의 말이다.
“직장 내 괴롭힘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심한 물리적 폭행을 당한 사례는 그렇게 많지 않다. 모욕적인 언사나 욕설, 업무 범위를 벗어난 부당 지시, 부적절한 신체접촉, 군대식 상명하복을 직장에서 그대로 모사해 강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거나 위협하는 행위 등이 대부분이다. 다수의 가해자들은 ‘친해서 그랬다’ ‘괴롭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피해자가 예민하다’ 등의 변명을 한다. 명백한 폭행 사실이 없는 경우 회사에서도 상급자인 가해자들의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거나 조사 과정에서 신고를 철회하는 이유다. 그러나 앞서 나열한 행위들은 근로기준법의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들이다.”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이란 직장에서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이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괴롭히는 것은 물론 동료 다수가 소수를 괴롭히는 것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되며, 괴롭힘에는 신체적 괴롭힘(폭행·위협) 언어적 괴롭힘(폭언·모욕 등) 업무적 괴롭힘(차별·배제 등) 업무 외 괴롭힘(심부름·장기자랑 등) 집단적 괴롭힘(왕따·소문) 등이 포함된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